꼬마민주당의 몰락, 한나라당 입당과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 4대개혁입법의 좌초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을 시작하며...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음에도, 또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한국의 정당은 과거의 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대의정치체로서 정당의 본질적 임무인 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지도력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정당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정당체제라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이에 무엇보다 최우선 할 것이 과거를 정확히 되짚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찾는 단서를 찾고자 합니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는 기존 자료의 재정리 방식이 아니라 한국정당을 이끌어 오신 정치지도자와 주역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동영상 증언> 방식입니다.

60여년의 한국정당사 전체를 살아있는 정당주역들로부터 듣는 ‘증언록’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아직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야심찬 기획입니다.

한국정당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이념노선, 정책, 인물, 리더십, 정체성, 지역성, 파벌성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정당의 본질은 다름 아닌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정치라는 점에서 과연 과거 정당들이 그 시대 민의를 제대로 대변했는지, 또 어떻게 민의를 억압, 왜곡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슈별로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정치적 진실도 증언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폴리뉴스> 창간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에 대단한 열정과 성의를 보여줬다. ⓒ폴리뉴스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의 세 번째 인터뷰 인물은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이끌었던 그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더불어 군사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를 주도했던 ‘재야 3인방’ 중 한 명이다.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부총재, 통합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부총재, 열린우리당 의장까지 각 정당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한국정치사의 주역이자 한국정당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월22일 광화문에 위치한 이 전 의장 사무실에서 김능구 본지 발행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3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특히 이 전 의장은 “지난날 과거를 올바로 조명해야 미래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며 <폴리뉴스> 특별기획 취지를 높게 평가하고, 자신 스스로 ‘오래된 미래’라 규정하는 한국정치사에 관한 기록을 두꺼운 대학노트 1권 가득히 정리한 채 인터뷰에 응하는 열과 성의를 보여줬다.

그는 또 비록 익숙지 못한 타자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며칠에 걸쳐 직접 작성한 생생한 증언을 참고자료로 취재진에게 보내오면서 “사초의 중요성에 입각해 기술했다”고 밝혔다.

지면을 빌어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취재진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사는 총 3편으로 나눠 게재할 예정이며, ①편에서는 동아투위와 당시 시대적 배경, 87년 6월 항쟁과 양김 분열, 87년 체제의 특성, 3당 합당과 재야민주세력의 대응 등에 관한 그의 생생한 증언과 진솔한 입장을 ②편에서는 92년 총선과 대선, DJ의 정계은퇴와 복귀에 따른 민주세력의 혼란과 정계개편 등에 관한 숨겨진 얘기와 정치적 의미에 대해 ③편에서는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양대 세력 내에서 이 전 의장이 겪었던 남모를 고통, 4대개혁입법 좌초 과정 등 열린우리당 창당부터 해체까지 숨은 비화와 함께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에 대해 전할 계획이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③ 전문 및 동영상


* ‘폴리뉴스 창간 9주년 특별기획 <한국정당실록 60년> 이부영②’ 편에 이어

94년 후반, DJ의 정계복귀와 96년 15대 총선을 거치면서 통합민주당은 제1야당에서 15석의 꼬마민주당으로 전락했다.

대신, 호남의 맹주 DJ를 정점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다.

DJ의 정치적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라는 한국정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후 꼬마민주당은 이기택계와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며 ‘내홍’을 겪게 된다.

당 대표 경선에서 이기택 전 의원이 당선되면서 통추 세력은 DJ의 국민회의로 결합했다.

당을 떠받드는 한 축인 통추 세력이 빠져나간 꼬마민주당 이기택계는 조순 씨를 새로운 총재로 영입했고 곧이어 이회창 총재의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국민회의 합류를 거부했던 제정구, 이부영, 박계동, 김원웅, 이철 의원 등은 이회창-조순 연합에도 합류를 하지 않다가, 9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나라당에 개별 입당했다.

당시 이들의 한나라당 합류를 두고 야권과 재야에서는 일제히 ‘변절’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에 대해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나처럼 재야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진보성향의 정치인이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고, 통추가 자신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DJP연합을 선택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냐”며 “결과적으로 승자 중심으로 역사는 다시 쓰이지만, 통추가 DJP연합에 합류한 것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 투항해버린 꼴”이라고 반박했다.

이 전 의장은 “결국 DJ의 정계복귀로 인한 통합민주당의 분해는 3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보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의 무산을 의미한다”고 정리했다.

DJ, 제15대 대통령 당선... “인위적 정계개편과 의원꿔주기, 민주주의자가 할 짓 아냐”

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사 최초로 ‘여야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IMAGE1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연대, DJP 연합을 통해 충청표를 잠식했고, 이와 더불어 이인제 후보가 한나라당 경선에 불복, 국민신당 후보로 나서면서 ‘대세론’을 굳히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결국 DJ가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호남의 한’도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이는 역으로 영남의 지역주의를 강하게 결집시켰다.

이부영 전 의장은 97년 대선을 바로 앞에 두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이 전 의장은 “97년 선거 거의 임박해서 나하고 박계동, 김원웅 전 의원이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있다가 한나라당에 입당했다”며 “그때 정치를 집어던질까, 시민운동으로 갈까, 그런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이어 “DJ정부 출현 후 98년이 되니까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하나둘 국민회의로 갔다. 한 해 동안에 36명이 갔다”며 “DJ 쪽에서는 정권을 뺏기고도 협력을 못하는 사람들을 굴복시키려면 의원들 더 많이 확보해서 (JP의) 총리 인준을 받아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의원들을 데려갔다”고 인위적 정계개편 과정을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그러면서 “한나라당이 JP 총리 인준 지명을 계속 거부했는데, 그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정권을 잡아서 총리를 하겠다고 그랬으면 패자 쪽에서는 그걸 인정을 해야 된다. 그래야 정부가 돌아갈 것 아니냐”고 한나라당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 전 의장은 또 “DJ 쪽이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주기 위해 국민회의 의원 세 명을 그리고 또 파견했다”며 “의원을 끌고 가는 것도 그렇지만 의원을 그리로 보내서 교섭단체를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은 총선이 필요 없다는 뜻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위적 정계개편’에 이어 ‘의원 꿔주기’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 전 의장은 “한나라당에서 총리 인준을 안 해주는 것은 못났기 때문에 안 해주는 거고, DJ 쪽에서 비리 등으로 의원들 협박해 끌고 가고, 또 의원 세 명을 꾸어주고 이것은 민주주의자가 할 짓은 아니다”며 “잘못한 걸 따지자면 총리 인준을 거부한 한나라당이 50점이라면, 그건 100점쯤 더 잘못하는 거라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장과 원내총무로서의 이부영 ‘15대 총선 승리의 밑바탕’

이 전 의장은 “이회창 씨가 무슨 생각인지 나한테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장을 맡아 그걸 막아달라고 했다”며 “그건 난 막아야 된다고 생각해 맡아서 격렬하게 투쟁했고, 결국 저지시켰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99년에 이회창 총재가 나보고 원내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며 “새정치국민회의 그 쪽에서 워낙 세게 나오니까 교섭들을 못 해서, 3선·4선·5선 다선의원이 가득한데도 겁이 나서 다 안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원내총무 시절, 이 전 의장이 이회창 총재와 국정에 관해 의논을 나누고 있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출장 갈 일도 있고 해서 미국으로 가서 안 한다고 했더니, 가는 곳마다 전화를 해서 제발 오라고 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부영 시켜야 된다고, 그리고 ‘너 나가서 당해봐라’ 이런 거였다”고 원내총무를 맡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200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걸 나보고 유리하게 따오라고 했다”며 “정당에서 선거법 협상, 특히 야당에게는 정당 사활을 건 협상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과정(선거법 협상 과정)에서 (여당) 원내총무 세 명이 갈렸다. 손세일, 한화갑, 박상천 다 나한테 나가떨어졌다”며 “그래서 선거법을 이회창 씨가 바라는 대로 다 얻어줬고, 결국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됐다”고 주장했다.

“다 써 먹었다는 판단으로 나를 버리려 해”
2000년 전대 박근혜에 이은 3위, 2002년 대선 경선 15% 지지 획득


이 전 의장은 “제1당이 되고 나니 중앙당에선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나를 버리려 했다”며 “결국 나에 대해 자기들이 써 먹을 것은 다 써 먹었다는 판단이었다”고 비난했다.

이 전 의장은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 15%의 지지를 획득했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2000년 5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나갔다”며 “한나라당 대의원들이나 당원들은 야당파괴저지투쟁과 원내총무로서의 내 역할 때문에 당이 지켜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총재나 실력자들은 날 괄시하지만 의원들은, 특히 수도권 의원들은 나 때문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당대회 출마 배경을 밝혔다.

이어 그는 “그 사람들이 표를 줬다. 그래서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3위를 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의장은 “(전대 결과) 부총재가 됐는데 내쫓을 수도 없고, 그러더니 ‘당신, 전당대회 때 얘기하는 것 보니까 아직도 빨갱이 사상을 못 버린 것 같으니 나가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며 “김용갑, 이상배, 정창화 등 민정계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때 이미 (당에 대한)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후 이 전 의장은 2002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이 전 의장은 “2002년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가서 ‘신주류론’을 얘기했다”며 “이제 한나라당 바뀌어야 된다. 개혁세력이 나서서 신주류가 돼야지, 세상도 이렇게 바뀌는데 계속 극우보수로만 남아있어서는 변하는 시대에 적응해 낼 수 없다. 이 총재의 주류론? 그건 낡은 구주류론에 불과하다. 이부영이 신주류론이다. 그걸 혼자서 전국적으로 얘기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5% 지지가 나왔다”며 “한나라당 안에도 그렇게 가야된다고 생각하는 대의원들이 15%가 있었다는 얘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전 의장은 “그렇게 (경선을) 치르고 나니까 이제 아주 대놓고 정면으로 나가라고 그랬다”며 “그래서 젊은 의원들, 원희룡·김부겸·김영춘·김홍신 등과 그룹핑을 시도하고, 괄시를 받으면서도 ‘이 큰 정당이 계속 극우보수로만 가게 해선 안 된다. 우리가 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국민들이 이 정당을 달리 볼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야 된다’는 논의를 계속 했다”고 소회했다.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 “이회창, 개혁적 흐름을 받아들였어야”

97년 대선에 이어 대권 재수에 도전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초반의 ‘대세론’을 굳히지 못하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다.

개표 결과 노무현 48.9%, 이회창 46.6%, 권영길 3.9%의 득표율로, 노 후보가 이 후보를 2.3% 차이로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호남의 압도적 지지(93.2%)를 받은 노 후보는 영남에서도 25.76%라는 의미 있는 득표를 획득했다. PK 출신 노 후보의 反지역주의 정치행보가 영남 유권자들에게도 다가선 것이다. 또 노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충청민심을 자극했고, 이는 결국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를 25만여 표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

여전한 지역주의 높은 장벽 속에 치러진 16대 대선은 세대 간 대결양상을 낳았고, 인터넷 공간은 뜨거운 ‘노풍’ 바람의 근원지였다.

이 전 의장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또 졌다”며 “내가 얘기했던 개혁적 흐름을 다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라도 받아들였다면, 그 세력을 노무현에게 다 뺏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회했다.

이 전 의장은 “김대중 정부의 농수산물개방 조치로 2001~2002년 농민들 항의가 굉장히 컸다”며 “김대중 정부에 항의하는 농민대회에 노무현은 나갔지만, 이회창은 안 나갔다. ‘돌을 맞더라도 나가야 한다. 그 사람들은 돌을 던지면서도 자기들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적대해서 돌을 던진다고 생각하지 마라’고 얘기했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이회창 후보를) 겨우 끌고 나갔던 게 효순, 미선 사건 추모 집회였다”며 “그 때 한나라당 보수파들이 난리가 났었다. 미군장갑차에 여중생들이 깔려죽어 친북좌파세력들이 반미감정으로 모여 있는 곳에 어떻게 보수파인 이회창 씨가 가냐. 이부영이 이회창을 빨갱이로 만든다고 야단이 났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보수파들이 이회창 씨가 그곳에 나갔다고 표를 안 찍었을까. 아니다”며 “남북관계에 관심 있고, (사고가) 열려있어야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전 의장은 “그것으로 인해 한나라당 내 민정계 등 보수파들한테 나는 완전히 찍혔다”며 “당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태동, 그리고 노무현...

이 전 의장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그 내부에서도 DJ로부터의 독립 움직임이 서서히 움텄다”며 “(저 역시) 한나라당에 더 이상 불어있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전 의장은 “96년 우리가 만들려 했던 지역주의, 보스정치를 극복하는 걸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런 차원에서 한나라당 젊은 의원들 겹집을 시도했더니, ‘야당에서 여당으로의 옮겨 가는 것’이라며 젊은 의원들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결국 내 선거구가 강남벨트였지만 낙선을 각오하고 움직이자 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 이 다섯 명이 결단했다”며 “민주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결단을 못하고 논란만 벌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먼저 결단하고는 ‘나와라, 빨리 민주당에서 나와라’고 소리 질렀다”고 밝혔다.

이른바 ‘독수리5형제’(이부영·이우재·김부겸·김영춘·안영근)의 탈당 및 민주당 분당과정 끝에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이라는 진보개혁 이념 바탕 위에 ‘호남에서 탈피한 전국정당’과 ‘정당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전 의장이 열린우리당 의장으로서 중앙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라며 “그렇게 힘들여서 만든 정당이면 그 정당을 애지중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원칙으로 내세우며 기존 당청 간 정무기능을 상당 부분 축소시켰다.

이 전 의장은 “물론 자기가 민주당의 도움을 받아서 (대통령이) 된 게 아니라, 정당 밖의 노사모 세력 도움을 받아서 (대통령에 당선이) 됐기 때문인지, 열린우리당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노 전 대통령은) 17대 총선을 통해서 새로 들어온 지지세력들만 끼고 정치를 했다”며 “그러니 당 속에 ‘노사모당’이라는 또 다른 당이 있는 것과 같았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장은 “그 사람들이 청와대나 밖의 노사모 세력을 배경으로 당 내에서 또 다른 당을 만들고 흔들어버리니까 당 중진들이나 또 얘기해야 될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버렸다”며 “완장부대가 당을 흔드는 거였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열린우리당 의장 이부영, ‘100대 과제’와 ‘4대개혁입법’

이 전 의장은 “정동영, 통일부장관으로 가버리고, 신기남, 아버지 문제 때문에 의장에서 낙마해버리고, 내가 (의장직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청와대에서는 내가 되는 걸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막으려 했다”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그러나 나는 ‘내가 의장이 돼서 내 의지대로 당을 이끌어보겠다, 당을 이렇게 만들어 버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니까 (청와대에서는) 원치 않지만 선택할 길이 없었다”며 “어쩔 수 없이 의장이 됐고, 나는 노무현 직계세력, 이들을 좀 설득해서 순화해 보려고 노력했다. 질서도 꽤 잡았었다”고 소회했다.

그러면서 이 전 의장은 “정동영, 천정배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 너무 과욕을 부렸다”며 “100대 과제와 4대개혁입법을 내세우면서 2004년 정기국회에 그걸 실현시키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정치를 지켜봐 온 입장에서 저렇게 무모할 수가 있는가. 152석이라는 과반 조금 넘는 의석을 가지고 100대 과제, 4대개혁입법을 그해 정기국회에서 실현시키겠다고 하는 게, 이건 정말 겸손하지도 않고, 초년병 정도의 정치적 무지를 드러내는 거라 봤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눈에 보이지 않게 내가 친노세력하고 굉장히 큰 갈등을 겪었다”며 “그런데 난 원외에다가, 민주당이 아닌 한나라당에서 왔다는 그런 (핸디캡), 민주화운동 경력이 꽤 많지 않았더라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 나도 뚝심이 있으니까 그걸 견뎌내고 해 보려 했다”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의원들 의견 분포를 보니까 관료출신이나 민주화운동 출신 아닌 의원들은 (4대개협입법 중 하나인) 국가보안법 즉각 폐지를 반대했다”며 “여당 안에서 절반가량이 반대하고, 한나라당이 반대하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겠냐”고 반문했다.

이 전 의장은 “그런데 바깥에서는 한 달 이상을 재야세력이 천막농성하며 폐지 압박을 가했고, 친노세력도 폐지 주장에 동참했다”며 “그렇지만 실질적 의석 구성 분포를 보면 그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김덕룡·이부영·천정배 4자협상과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

이 전 의장은 4대개혁입법이 난항에 봉착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사회적 이념갈등으로 확산되자 중재안을 내놓는다.

이 전 의장은 중재안 내용과 여야 협상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실적 방안을 택하자. 국가보안법 중 찬양·고무·동조·회합·통신 등 아주 독소조항만 우선 없애고, 그 대신 (남은 4대개혁입법인) 신문법, 과거사법, 사학법 이것들은 여당인 열린우리당 주장이 거의 반영된 쪽으로 하자. 즉 국가보안법은 폐지를 안 하고 개정을 한다, 대신 이 3개법안은 열린우리당안을 받아들여서 협상하자. 그래서 박근혜·김덕룡·이부영·천정배 4자협상에서 타결을 하자. 양당의 법사위 간사들을 시켜서 국가보안법 개정안 초안을, 아까 얘기한대로 찬양·고무·동조·회합·통신 이 부분만 없애고 안보부분, 간첩부분 이런 건 그대로 받아들여서 안보세력이나 이쪽 보수세력의 안심과 동의를 얻어내고. 결국 4자회담에서 (4대개협입법안) 합의가 됐다”

2004년 12월, 4대개혁입법으로 국회파행이 거듭되자 여야가 만나 4자합의를 이끌어냈다. ⓒ폴리뉴스
이 전 의장은 “4자회담에서 합의가 다 됐는데, 이것을 열린우리당 의총에서 토론에 붙이니까 친노세력들이 길길이 뛰면서 그걸 다 무산시켰다”며 “4자합의가 여당 의총에서 깨져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의장은 “나는 천정배 의원을 대단히 똑똑한 사람으로 봤는데, 그때 크게 실망했다”며 “일부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농성하고 있는데, 거기에 합의안을 갖다 놓으면 되겠냐고. 위임을 받아 나가서 협상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다수에 의한 추인을 받아야지, 토론을 붙여서 완전히 난장판을 만들어 버렸다”며 당시 천정배 원내대표의 판단 부재를 혹독히 비판했다.

이어 그는 “특히 임종인 같은 사람, 토론이 안 되게 만들었다”며 “온건한 다수파들과 중진들이 입을 다물어버렸고, 결국 그게(합의안이) 깨졌다”고 무척 아쉬워했다.

이 전 의장은 “(4대개혁입법의 실패 책임을 지고) 천정배 의원이 원내대표를 사퇴했고, 친노 젊은 의원들은 이부영이 배신자라고 막 욕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냐,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겠냐”며 의장직 사퇴 배경을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국가보안법으로, 그것만 가지고 (내가) 네 번 징역을 산 사람인데,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럴 땐 거기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폐지하라고 몰아붙이는데 그건 참...”이라며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이 전 의장은 “다 날라갔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안 되고, 나머지 법도 안 되고, 그리고 넘어가 버렸다”며 당시의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이 전 의장은 “도대체 지금 어떻게 됐냐. 국가보안법 그대로 살아있지 않냐”며 “이 문제에 대해 특히 유시민 같은 친노세력의 입장을 한 번 들어봐야 된다. 정말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의장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며 폐지하라는 소리를 했지만, (국회) 안에 구성을 그렇게 안 되어 있는데 그게 되겠냐”며 “이를 계기로 노무현 정부의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사민주의 도입으로 경제위기 극복해야”

경제위기를 극복할 대안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며 최근 근황을 밝힌 이 의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극화와 소득격차 등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 한국사회에 큰 불행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대기업조차 생산 감축과 구조조정 등에 들어갔는데, 밑에 딸려 있는 하청업체와 부품업체 등은 어떻게 되겠냐”며 “소자영업자들 중심으로 중소기업이 줄도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장은 또 “지난 IMF 외환위기보다 이번 경제위기가 더 길어질 수 있다”며 “인권과 의회민주주의 등 자유민주주의 뼈대는 가져가되 경제정책에 한해서는 사회대타협을 중시하는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새로운 패러디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 의장은 “요즘 들어 학계와 시민사회 중심으로 사민주의 얘기가 부쩍 많이 나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신자유주의 폐해를 줄이고 서민과 중산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그러나 북한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흐름이 나온다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의장이 정치권에서 일관되게 걸었던 길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의 타파에 있다. 이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스가 ‘공천’과 ‘재정’을 독점하면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폐해들, 즉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혼은 아직 그가 이루지 못한 ‘정책정당, 전국정당, 민주정당’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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