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받는 정의는 아름답지만, 혜택받는 정의는 불편하다

정의의 여신상. (사진=대법원 홈페이지)
▲ 정의의 여신상. (사진=대법원 홈페이지)

대법원 청사에 가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이 ‘정의의 여신상’은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법의 중립성 내지 형평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만큼 법관에게는 공정함을 추구하여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함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만약 법관이 어느 한쪽 편이라고 알려지는 순간, 누구도 그 저울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현직 판사들의 정치권 직행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양승태 사법부 사법 농단' 관련 의혹을 폭로했던 이수진 부장판사는 진작에 총선 출마 의사를 밝힌 뒤 사직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더구나 이 판사는 법관으로 재직중에 언론을 통해 출마 의사를 밝혀 더욱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어서 사법 농단 사태 때 법관대표회의 의장을 맡았던 최기상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가 얼마전 사직했다. 역시 여당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아 총선에 출마하게 된다고 한다. 법관대표회의 의장을 맡았던 상징성이 따르는 인물이라 파장이 따른다. 그런가 하면 광주지법 장동혁 부장판사도 총선 출마를 위해 사직했다. 그는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고 한다. 장 판사의 퇴직으로 전두환 씨의 형사 재판 지연도 불가피해졌다.

총선 출마는 아니지만, 2017년 초 ‘양승태 법원행정처’를 가장 먼저 비판한 김형연 당시 부장판사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사표를 내고 곧바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가 법제처장으로 승진하면서 비운 자리는 ‘양승태 판사 탄핵’을 주장했던 김영식 전 부장판사가 물려받았다. 두 사람의 경우도 법관들의 청와대 직행이 적절한가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사실 처음 보는 광경들은 아니다. 언론인들 또한 정치권 혹은 청와대 직행버스를 타기 시작한 것이 오래되었다. 현직에 있으면서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언론인들이 하루 아침에 한쪽 편이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 하곤 한다. 심판인줄 알았더니 사실은 선수였던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이미 언론인들은 너무도 당당하게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인지라, 법관들은 왜 우리만 갖고 그러느냐고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선택들이 안겨주는 신뢰의 실추를 헤아리지 않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어느 한쪽 편과의 각별한 인연을 선언하는 순간, 그가 했던 이제까지의 언행들은 “아, 정치하려고 그랬구나”라는 한 마디로 정리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정치적 중립성과 형평성 또한 의심받게 되고 만다.

이런 논란을 무릅쓰며 기어코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드는 궁금증이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알려지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를 하려고 나서는 것일 까.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정치가 갖는 효율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지 않고 조금만 유명해지면 정치권행을 택하는 세상인지라 그 사연이 궁금할 때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까지의 삶이 지루해져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진 것일까. 그런데 그게 왜 꼭 정치일까. 물론 우리 사회를 자신의 힘으로 더 좋게 만들어 보고 싶은 공익적 동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인도, 판사도, 교수도, 자신이 하던 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새로운 자리에 대한 욕망이 자리함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 출신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에서 거의 모든 지식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뿌리깊은 갈망이 있는데,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사회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높은 두드러진 지위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한다. 호퍼는 재능이 대단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식인조차 영원히 자신을 믿지 못하여 날마다 자신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지 않으면 못견뎌 한다면서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한다. "허영이 혁명을 만든 것이다. 해방은 명목일 뿐이었다."

윤리적인 책임은 제쳐버린채 ‘기-승-전-정치’의 코스가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은 자칫 우리들의 삶의 뿌리를 잃게 만들 위험이 크다. 다른 나라들에 설치된 디케의 여신상은 두 눈이 가려져 있다. 디케의 여신은 아무 것도 보지 않아야 공정함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법원에 있는 디케의 여신은 눈이 가려져 있지 않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정의를 구현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부릅뜬 눈으로 저기 담너머에 있는 정치의 세계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정치권으로 가는 급행 직행버스를 탄 법관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핍박받는 정의는 언제나 아름답지만, 혜택받는 정의는 이렇게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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