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건 일상이 아니다
뉴노멀(New-Normal), 곧 “새로운 일상”은 어느 날 불쑥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팬데믹을 겪고 있는 일 년 육 개월 사이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초만 하더라도 이 말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관계를 설명하는 보조적 개념으로 활용한 사회적 거리(120-360㎝)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교롭게도 침방울에 의한 감염을 막는 거리와 일치하기는 해도 방역에는 ‘물리적 거리 두기’가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가족에게도 낯선 사람들처럼 사회적 거리를 둔다는 것만큼이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뉴-노멀”이다. 노멀(normal)은 보통(普通)이나 평상(平常)을 뜻한다. “날이면 날마다 늘 꼭 같은 것”인 일상(日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새로운 것을 꿈꾸지만, 대개는 그 꿈이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은 새롭지 않다. 거꾸로 이전에는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였지만 다시 일어나지 않거나 못하게 되었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예사로운 것들을 더는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서세동점 이후 서양 근대를 겪으면서 세계는 급속하게 공간을 압축하여 거리를 줄여나갔다. 미국 모델의 근대화 경험에 이어, 민주화와 함께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었던 우리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이 대열에 합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으면서 우리 사회는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일상을 경험해야 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찾아온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뉴노멀”이 이목을 끌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빌려 말하면 “새로운 건 일상이 아니다.”
일상을 낯설게 하는 시선
일상은 새로울 게 없지만, 전에는 한 번도 겪어본 일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는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방학 때는 지인이 살던 거제도 구석구석을 뛰어다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만큼 “바다”가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십수 년 전 제주에 들어와 살 마음을 먹었던 날에 마주한 밤바다는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 “족히 스무 해를 넘게 살아야 할 이 섬이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라는, 전에 없었을 뿐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한,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섬이라는 제주에서 살면서 그 낯선 두려움을 틈틈이 꺼내 곱씹어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꽤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도 별다르지 않은 걸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제주에서 다섯 성현[五賢]으로 손꼽히는 조선 유학자들의 문집에서도 바다 한가운데 외딴 섬에 대한 두려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선이 노닌다는 전설의 영주산(瀛洲山)으로 탈바꿈시켜도 1등급 유배지인 절해고도에서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외지인에게 섬은 낯선 공간이고, 그곳에서 사는 섬사람은 타자(他者)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제주 열풍에서도 이런 시선은 드러난다. 제주를 찾고, 소비하면서 개발을 부추기는 외지인에게 제주는 일상에서 벗어나서 특별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낯선 공간이다. 관광객이건 단기체류자건 외지인은 그곳을 일상으로 하고 사는 섬사람을 낯선 공간 한 켠을 채우고 있는 구성요소로 대한다. 이러한 시선과 태도는 섬사람을 포함한 섬 경관을 단순히 낯설게 보고 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존재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섬과 섬사람이 스스로를 일상에서 소외시키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특별한 일상을 위한 지침
유가 경전 가운데 정치철학 지침서인 대학 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친애하는 데 있으며, 최선에 이르는 데 있다.” 삼강령(三綱領)이라고 불리는 이 구절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특히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이냐, 친애하는 것(親民)이냐를 두고는 오래도록 논란이 일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각 학파의 현실에 대한 태도는 초기와는 정반대로 엇갈리지만, 대개 이상주의자일수록 신민을, 현실주의자일수록 친민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뉴노멀 시대 경계 위의 섬”이 처한 위기의 상황과 변화의 기대를 되짚어보면서 “친민”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의 일상이 타인에게는 특별한 일상”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에서 섬의 불확실하고 우려되면서도 기대되는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섬을 지탱하는 힘인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곳에서 살아가면서 정체성을 쌓아가는 사람을 아끼며, 섬과 섬사람의 삶이 가장 적절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상이 가진 특별하고 대단한 힘이다.
새로운 것이 일상이 아니듯, 특별한 일상을 위한 지침이라는 게 뻔한 사실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1980년대 이후 상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소비해온 “생산적 소비자(prosumer)”의 덕에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와 제주 올레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확장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순례길,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골목 안쪽 길이라는 특별한 정체성이야말로 “산티아고와 집으로 가는 길”의 성공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김치완 교수는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학위와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논문 「주자학적 전통에서 본 다산의 인간관 연구」로 다산학술상을 수상했다.
* 현재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추진하는 ‘섬 인문학 연구단’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부학장, 총장추천관리위원장, 기초교양교육원장, 신문방송사 주간, 교육혁신본부장, 탐라문화연구원 편집위원장, 전국국공립대학 신문방송사주간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의 로컬리티 담론 공간과 철학 (2015,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난민 문제로 보는 섬성(Island Identity) 변화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모던(Modern)과 경계 개념을 중심으로」( 도서문화 57, 도서문화연구원, 2021)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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