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시드니 오페라극장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추모
[폴리뉴스 한유성 기자]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삼는 카리브해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가 3년 내 공화국 전환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하겠다고 밝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직후 영연방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거세질 것이라는 해석이 힘을 실었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개스턴 브라운 앤티가 바부다 총리는 전날 영국 ITV에서 "이것은 우리가 진정한 주권 국가임을 확실히 하고, 독립의 고리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면서 군주제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 추진 의지를 드러냈다.
ITV와의 회견에 앞서 찰스 3세를 차기 국왕으로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한 브라운 총리는 공화국으로의 전환이 앤티가 바부다와 영국 사이의 적대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면서,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더라도 앤티가 바부다는 영연방(Commonwealth)의 헌신적인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 투표 시기를 묻자 "아마도 3년 이내에 이뤄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영연방은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독립국 56개국으로 구성된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를 뜻한다. 영국 국왕은 영국을 비롯하여 호주와 캐나다, 뉴질랜드까지 15개국의 군주이자 56개국이 참여한 영연방의 수장이다. 국왕은 상징적인 역할에 그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론조사에서 늘 압도적 지지율을 보이는 여왕의 개인기가 크게 작용하며 21세기에도 군주제가 유지되도록 지켜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이 컸던 만큼, 찰스 3세의 어깨도 결코 가볍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왕세자로 낙점된 뒤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나, 어머니와 비교했을 때 인기가 크게 떨어진다. 찰스 3세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미약하다보니 영국에서는 이참에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군주제 폐지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인 '리퍼블릭'은 현대민주주의에서 왕실은 설 자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지비용만 막대하게 차지하고 있다며 군주제 폐지 선거만을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찰스 3세가 당장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면서 영연방 국가들이 동요하고 있다.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고 연방 내 다른 국가들에서도 공화제 전환 논의가 빗발치고 있다. 호주를 비롯한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가운데 앤티가 바부다는 영국을 포함해 영국 국왕이 국가 수장을 맡는 15개 국가 중 하나로, 앞서 브라운 총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배우자인 웨식스 백작 부인이 올 4월 자국을 방문했을 때도 앤티가 바부다의 공화국 전환을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군주제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은 자메이카, 바하마, 벨리즈 등 다른 카리브해 국가에서도 감지된다. 앤드루 홀니스 자메이카 총리는 3월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 자메이카가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정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벨리즈의 한 장관도 "진정으로 독립하기 위한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할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윌리엄 왕세자 부부는 당시 중남미 방문길에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과 노예제의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직면해야 했다. 유럽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5∼19세기 아프리카인 1천만 명 이상이 백인 노예상에 의해 카리브해로 강제 이주했고, 플랜테이션 농장 등지에서 노동착취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디언은 윌리엄 왕세자가 당시 카리브해 국가를 방문한 후 "미래는 국민이 결정할 일"이라며 카리브해에서 군주제가 유지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전했다.
한편, 영연방 국가이자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삼고 있는 호주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를 계기로 군주제 폐지 논의가 불붙고 있지만, 호주 총리는 당분간은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11일 영국 스카이뉴스에 따르면,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지금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해야 할 때"라면서, 자신의 첫 임기 동안에는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앨버니지 총리는 지난 5월 취임했다. 호주 총리의 임기는 3년이다. 앨버니지 총리는 호주 ABC와 인터뷰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애도하기 위해 오는 22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는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직후 2주간 국회를 중단하기로 했으며 국회의사당과 연방 정부 건물에는 조기를 내걸었다. 여왕을 대리했던 호주 총독 데이비드 헐리는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찰스 3세를 이날 새 국가원수로 공식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