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를 일컫는 영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politician과 states(wo)man, 즉 statesperson이다. 전자는 권력 쟁취와 당선을 목표로 여러 다른 이해 집단 사이를 입속의 혀처럼 매끄럽게 오가는 ‘사기꾼’이라는 부정적인 어감이 일부 깔려 있는 반면, 후자는 사회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무엇을 해야하며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공공선에의 복무자’라는 긍정적인 어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전자를 정치가라고 옮기고 후자를 국가 지도자라고 옮기기도 하지만, 전후 맥락을 보자면 그렇게 쭉 갈라서 나눌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플라톤은 분명히 이 ‘국가 지도자statesperson’의 임무와 자격 등을 논하고 있지만, 그 저서의 제목은 ‘정치가politikos’라고 달려 있다. ‘정치가’라는 동일한 존재가 갖는 두 모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이태원 참사 특위 위원장을 맡은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24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계획서 승인의 건 의결에 앞서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 2022.11.24
▲ 이태원 참사 특위 위원장을 맡은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24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계획서 승인의 건 의결에 앞서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 2022.11.24

문제는 지금 현실 정치가들에게서 전자에 해당하는 모습만 보일 뿐, 후자에 해당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정치가들과 정당이라는 존재는 ‘세몰이와 당선에 도움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이들’이며 ‘일단 권력만 얻고 나면 무슨 일이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절망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국가는 여기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국가 기구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운영할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도 활동도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는 정치가 또한 개인이든 정당이든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의 이 두 정체성이 확 갈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자가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산업사회’의 출현이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사상가 생-시몽이 이 점을 실로 날카롭게 지적한다. 농경 사회에서는 사회와 경제의 작동이라는 것이 자연의 순환과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정치가 별로 역할을 할 것이 없었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정치란 그저 누가 더 많은 권력을 가져갈 것인가의 ‘권력 정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기술 진보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조직되는 산업이 사회와 개인의 안녕 및 자유와 공존할 수 있으려면 정치는 더 이상 ‘권력 정치’가 되어서는 안 되며, 과학적 연구 조사에 근거하여 항상 사회를 더 합리적 효율적 이상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실현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20세기 이후 영국 진보 진영의 가장 중요한 매체의 하나였던 [뉴 스테이츠먼 New Statesman]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파비안 협회의 지원으로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 부부가 주도하여 1914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고도의 산업사회로 변모한 현대 영국의 정치가 아직도 19세기 빅토리아여왕 시절의 케케묵은 인물들과 사상에 붙들려 있는 것을 한탄하고, 20세기의 새로운 현실에서 마구 밀려드는 새로운 도전들과 문제들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고 토론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지도자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같은 혁신적인 경제 사상가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경제 정책의 관점을 설파하는 데에 중요한 장이 이곳이기도 했다. 경제 문제 뿐만 아니라 소련에 대한 관점이나 전쟁에 대한 태도 등 국제 정치의 지각 변동에 맞서 뜨거운 논쟁이 오간 곳이기도 했다. 영국의 진보 세력이 단순히 노동자 정치의 당파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국가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걸출한 인물들, 그야말로 ‘새로운 스테이츠퍼슨’을 배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이러한 ‘새로운 스테이츠퍼슨’의 등장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급격한 기술 혁명은 물론,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 세계적으로 지정학적인 지각 변동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으며, 기후위기 등의 도전은 산업 및 에너지 정책과 맞물리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산업 국가에서 정치 제도는 아직도 18세기에 착상된 대의제 민주주의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거대한 변화에 맞게 사회를 움직이고 또 국가를 움직이는 일이 불과 3백명의 입법부 의원들에게 맞겨져 있는 상태이다. 영화 ‘300’에서 보듯, 이 3백명이라는 숫자는 좁은 길목을 막고서서 페르시아 십만 대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도 했지만, 그 반대가 될 경우에는 즉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사회와 국가의 거대한 변화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병목’ 혹은 ‘비토크라시’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오늘날의 정치가들은 ‘영웅’이 되든가 ‘공공의 적’이 되든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 중 어떤 쪽이 될 것인가는 바로 그 ‘스테이츠퍼슨’의 덕목을 갖추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스테이츠퍼슨’의 덕목으로 강조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기술관료정치에 몰각되지 않는 ‘공공선에서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산업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정치가들은 구체적인 정책 과제의 입안과 실현방안의 마련을 이른바 ‘전문가들’이라고 불리우는 기술관료들 technocrats에게 일임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정책과 제도의 설계의 내용은 그들에게 맡기고, 본인들은 ‘당선과 권력 쟁취’에 몰두하면 된다는 참으로 편리하고 자의적인 노동분업이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기고 도처에서 포퓰리즘 정치의 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의 내용과 주장은 결코 그 자체로 ‘공공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여, 사회 전체라는 관점에서의 ‘공공의 이익’은 무엇이며 또 지금 이 시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야말로 플라톤이 말하는 바 ‘국가를 통치하는 데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전문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요컨대, 정치가들은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의 내용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그 중 핵심적인 쟁점을 골라내고 이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언어로 바꾸어 공론을 만들어 내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경제학 박사학위나 법률가 자격증이 그 자체로 이러한 전문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플라톤 말대로 이 또한 고도의 훈련과 연마를 통해 닦아 나가야 하는 덕목이다.

우리는 또 이 시대는 ‘새로운 스테이츠퍼슨’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21세기의 우리는 지금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지만, 여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를 개혁하고 또 전면 개조할 수 있는 기능은 오롯이 정치 제도에 맡겨져 있는 상태이며, 그 정치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이들의 너무나 많은 숫자는 세 싸움과 당선과 권력 쟁취의 기술에만 능한 politician 들이다. 이러한 ‘스테이츠퍼슨’은 하루 아침에 난데없이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비한 초인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랜 공부와 토론과 실천으로 단련되고 만들어지는 나름의 ‘전문가들’이다. 정치가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모든 사회 및 정치 담론의 지형이 ‘진영 논리’로 찢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가들이 그러한 단련으로 거듭날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스테이츠퍼슨의 부재’는 사회 전체의 담론의 위기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일이다. 따라서 ‘새로운 스테이츠퍼슨’의 출현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은 공론장의 재구성 뿐이기도 하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KPIA) 연구위원장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정치학 박사(요크대)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키워드

#홍기빈 칼럼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