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의 꺾여진 개혁

2000-11-09     박혜경 기자

개혁의 기수임을 자처해온 386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입법화에 모두 등을 돌리고 있다. 결국 독재정권의 상징인 국가보안법은 일부 조항의 개정에 머문 채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단지 법리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독재정치냐 민주정치냐를 가르는 핵심고리이다. 그 때문에 과거 민주화운동시절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투옥생활을 하였던 386정치신인들은 등원하면서 모두 한결같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드시 해내겠다고 한목소리를 내었고, 남북 해빙무드를 타면서 이 목소리는 더욱 커졌었다.

386의원들,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 서명에 불참

그러나 최근 이들 386의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법률안에 서명을 하지않고 모두 한발씩 뒤로 물러서있다.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을 발의한 의원은 386의원이 아닌 대전 유성구청장 출신 송석찬의원이다. 현재까지 서명한 의원은 모두 10명인데, 발의자인 송석찬 의원을 포함, 김근태, 정범구, 최용규, 설송웅, 김성호, 김태홍, 유재규, 송영진(이상 민주당), 서상섭(한나라당)의원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386의원은 김성호의원 한사람뿐이다.

소위 386의원이라 분류되었던 민주당의 김민석, 임종석, 송영길, 이종걸, 장성민의원과 한나라당의 원희룡, 김영춘, 김부겸, 안영근의원은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소위 '386세대' 국회의원 등 개혁성향의 의원들사이에서 국가보안법의 개정과 폐지에 대한 입장이 완전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본질적으로는 '폐지'의 기본원칙에는 동의하면서 과정상의 방법론에 대한 시각차가 존재하였을 뿐이었다.

특히 안영근의원의 경우 지난 7월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안의원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론이 민족이익과 상충할 때 후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며 '임기 4년안에 인권유린의 주범인 국가보안법이 없어진다면 40년을 의정생활한 것과 마찬가지 결실을 거두는 셈'이라고 강력히 폐지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설문조사에서 국회의원 73명이 국가보안법 전면폐지에 동의

경실련 통일협회가 16대 국회의원 전원을 상대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145명의원 가운데 50.3%인 73명이 국가보안법 자체를 전면 폐지하고 관련 조항을 형법에 흡수하거나, 대체입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고, 또 일부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의원도 46.2%인 70명에 이르렀다.

그동안 시민단체들도 현실과 맞지 않고 통일운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전면적 폐지를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지난 10월25일 전국 236개 시민, 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는 각계대표 201명의 서명과 여야 국회의원 17명의 청원소개로 국가보안법 폐지 입법청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법청원은 국민의 요구를 국회에 소개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실제 법안 개폐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청원소개에는 참여한 17명의 의원들 중 대다수가 폐지법률안 발의에는 찬성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안법 폐지의 당위성에 이같이 상당수의 의원이 동감하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당론이라는 커다란 벽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 발의를 주도하고 있는 송석찬의원 측에서는 "다른 의원들이 당론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서명을 망설이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시하며 "발의 정족수인 20인을 채우지 못할 경우에도 서명을 계속 추진, 법률안을 상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6대 총선을 통해 화려하게 정치권에 등장한 386의원들은 한때 크로스보팅 등을 요구하며 당과 계보를 떠나 '개혁'과 '국민'이라는 대의에 충실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또한 여야 386의원과 개혁의원의 연대움직임도 시도하였었다. 그러나 지난 '광주 술파동' 이후 386의원들의 개혁의지는 급속히 희석되고 기존 정치권에 편입되어 가고 있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과거 국가보안법에 의해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기도 한 386의원. 이번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는 다시 한번 386의원들의 개혁의지를 저울질해 볼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386의원들이 개혁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국민들의 비판과 분노는 구정치에 대한 그것보다 배이상은 클 것이라는 사실 또한 당사자들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임재형기자jhlim21@ewinc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