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도 정치 흉내내나
2001-01-06 박혜경 기자
시민단체 경실련이 공기업에 1000만원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을 요청했고, 이들 공기업들은 경실련으로 부터 판공비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강력히 받은 단체들이다. 그래서 경실련이 판공비 공개를 명목으로 후원금을 강제로 갹출한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경실련은 지난해 11월20일과 21일 주택공사 석유공사 등 5개 정부투자기관에 공문을 보내 "11월29일 열리는 경실련 11주년 기념식 및 후원의 밤 행사에 재정지원을 해달라" 며 지원금 1000만원을 요청했다.
경실련의 공기업 판공비 요구, 후원금 갹출을 위한 압력수단?
이번 경실련의 후원금 파동은 후원금으로는 과다한 1000만원이란 액수문제 뿐만아니라 후원금 요구의 대상과 방식에 대한 부도덕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경실련은 정부투자 기관의 판공비 실태를 언론에 공개하여 공기업 기관장의 과다한 판공비 책정과 졸속 집행을 비판하였었다. 그래서 경실련이 공기업 판공비 사용내역 등에 대한 정보공개를 강력히 요구한 것이 경실련의 후원금 갹출을 위한 압력수단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이다. 공기업에 칼을 들이대고 돈 내놓으라고 한 것아니냐는 비판이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경실련은 즉각적인 해명을 하였다. 김용환 정책실장은 "후원금 요청 공문을 발송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석연 사무총장이 친분관계에 있는 공기업 측에 먼저 연락을 취한 뒤 '근거서류를 남기기 위해 공문으로 보내달라' 는 요청에 따랐던 것" 이라며 "이중 3군데에서 100만~200만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고 말했다. 또한 이석연 사무총장은 "돈을 받은 공기업은 과거부터 경실련을 후원해온 곳들" 이라며 "앞으로 경실련은 절대 공기업의 후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시민들과 언론의 반응은 냉랭하다. 그것은 경실련이 정부투자기관의 판공비 사용실태와 관련하여 감시활동을 벌였던 시기와 후원금을 요청한 시기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실련은 내부의 부서간 이견이 조율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획 부서에서는 전부터 공기업에게 후원금을 받는 것이 관행이어서 후원회 날에 맞춰 공문을 발송하게 된 것이고, 사업 부서에서는 이 시기에 정부투자기관에 기관장 판공비 사용내역을 청구한 것이 오비이락식으로 우연히 일치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실련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경실련의 후원금 요구 시점이 공기업 판공비 사용 내역 공개를 요청한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공기업 판공비 사용 내역 공개를 후원금 모금을 위한 압력이었다는 의심은 지울 수가 없다. 한마디로 시민단체에서 그동안 비판해온 권력행사하기를 해온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에 뺨치는 정치를 했다는 분노가 일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 후원금도 최대한 100만원선인데 1000만원이라?
후원금 요구 공문에 1000만원이라는 거액을 명시한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경실련 측은 실수로 후원금 상한액을 1000만원 이하로 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적지 못하고 1000만원이라고 못 박고 공문을 보냈다고 하였다. 경실련의 경우는 이 금액이 일종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실련의 모습이 기성 정치인들이 범법을 저지르고서 그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고 발뺌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1000만원이라는 돈은 일반 서민의 일년 연봉에 해당될 수도 있는 거액이다. 뿐만아니라 정치권에서도 후원금은 최대 액수가 100만원이다. 그이상이 되면 로비자금으로 의심받기 때문이다. 또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로비자금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때문에 후원금을 100만원 이하라고 못박고 있다.
이번 판공비를 공개하라는 대상기관에 돈 1000만원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범법행위라는 것이 시민들의 일치된 생각이다.
시민없는 시민단체의 자화상, 또다른 권력기관인가
이러한 모습에 경실련과 e윈컴 게시판에는 비난하는 글이 폭주하고 있으며, 안티 경실련 홈 페이지까지 활동할 정도로 많은 시민들은 경실련을 비난하고 있다.
김로맨스라고 밝힌 네티즌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준조세, 내가 하면 불가피한 후원금"이라면서 경실련을 비꼬고 있다. 푸마시라고 한 네티즌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사람 을 나무랄 수 있나요?", "경실련이 하면 시민운동이고, 공기업이 하면 부정이냐." 하면서 왜곡된 경실련의 윤리 의식을 비난하고 있다. 그밖에 '부실 시민단체 퇴출위기에 놓이다. 부실 시민단체는 나라를 좀 먹는 암적인 존재다.'(정리해고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구나'(서글프다) 등으로 비난과 한숨섞인 글들이 올라왔다.
이번 경실련 사건도 열악한 우리 시민단체의 재정상태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발생한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다. 경실련회원의 회비 수입은 전체 예산의 40%에도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과 방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시민들의 참여없는 시민단체의 왜곡된 모습이 국민없는 정치의 왜곡된 모습과도 흡사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한마디로 이번 후원금 파문은 시민단체가 '정치'를 했다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제4의 권력기관으로 '권력'을 가진 시민단체의 권력남용, 권력왜곡의 한 형태였다는 것이 공통된 비판이다.
시민을 찾아가는 시민단체로 환골탈태해야
경실련은 시민단체의 생명인 도덕성에 스스로 흠집을 내면서 시민단체의 존립기반을 허물어 버리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경실련의 사건이 지난해 장원 전 녹색연합 사무총장 성추문 사건과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의 대기업 사외 이사 겸직 등의 사건처럼 전체 시민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정치가 아무리 왜곡되고 국민을 배신하고 있다하더라도 정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시민단체의 잘못으로 시민단체 자체의 역할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시민단체는 이 위기를 바람직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모금 방법을 개선하고, 예산 사용 내용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여,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NGO시대라고 할만큼 시민사회의 영역은 넓어졌다. 시민단체의 조직이 비대해지고, 시민이 없는 시민단체가 지속될 때 시민단체는 또 다른 권력집단으로 남을 것이다.
'시민과 함께하는 시민단체' 이것은 결코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있는 곳으로, 시민이 원하는 것을 찾아가야 한다. 이제, 시민단체는 앉아서 시민을 기다리는 관료적인 모습을 벗어나 '시민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서비스정신을 가진 시민단체'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우유신기자(milkgod@ewinc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