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경 시리즈①]전·의경의 역사는 정권의 부침사다!

2001-04-27     박혜경 기자

e윈컴 정치뉴스에서는 정권유지와 사회질서유지라는 두 역할을 수행하는 전·의경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전·의경의 역사가 곧 정권의 부침사였으며, 전경의 숫자가 많을수록 사회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우차 노조원 강경진압을 둘러싸고 경찰개혁 움직임과 더불어 전·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지난 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이래, 군인의 시위진압은 금기시되면서 80∼90년대 시위진압은 거의 군인으로 입대해 착출당한 작전전경(전경)들의 몫이였다. 90년대는 정치·사회·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 곳에는 항시 전·의경들이 무장한 가운데 대치하는 상황이 빈번했고 당연히 물리적 충돌을 빚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찰에 대한 대국민 감정은 정권의 행태와 시대상황에 따라 질곡의 역사였다.

1989년 5월 부산 동의대 사태, 학교건물 점거 학생들을 진압하던 경찰관 6명이 화염병에 불타 순직하면서 경찰은 국민들의 적잖은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그 2년 전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생 이한열군 최루탄 저격 사망 사건, 그리고 91년도 강경대 명지대생 폭행치사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경찰에 대한 일반인의 느낌은 한 마디로 분노였다.

대우차 노조원 과잉진압 사태가 터진지 보름이 넘어가는 지금, 경찰개혁이라는 단어 뒤엔 혈기왕성한 젊은 전·의경들이 있다. 전·의경들의 사회적 소외감과 박탈감, 그리고 법·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이에「e윈컴 정치뉴스」에서는 정권유지와 사회질서유지라는 두 역할을 수행하는 전·의경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전·의경의 역사가 곧 정권의 부침사였으며, 전경의 숫자가 많을수록 사회혼란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로 '전·의경의 역사'를 살펴보고 두 번째로 '전경제도의 한계와 전·의경들의 사회적 소외감과 박탈감'을, 마지막으로 '법적, 제도적 전경제도'를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시위현장에서 만나는 노동자·학생과 경찰(전·의경)과의 간극을 좁혀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전투경찰은 박통시절인 1967년 9월 대간첩 수행을 위해 급조

작전전경의 약자인 전경은 박통시절인 1967년 9월 대간첩 수행을 위해 월남전에서 귀국한 군장병들을 중심으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습격을 한 「1.21사태」가 발생하자 대간첩망의 취약지점 보강을 위해 정부가 급조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산악과 해안의 취약지구에 배치됐는데, 2년간 근무하면 일반부서 경찰로 채용된다는 특혜 때문에 시험을 치루고 들어갔음에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후 71년 박정희 대통형 유신체제하에서는 군입대자들중에서 차출, 해안경비와 시위진압에 동원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시위진압이 주 업무로 하게 됐다.
그러나 군복무중 강제착출로 전경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국회에서도 전경의 시위진압동원에 대한 법적근거가 문제화되자 정부는 83년 12월 '전투경찰대설치법'을 개정, 전경을 대간첩작전을 주임무로 하는「작전전경(전경)」과 「의무경찰(의경)」로 2원화했다.

작전전경, 의무경찰 출신과 임무는 달라도 시위진압시에는 하나

인원충원도 작전전경은 군에 징집된 병력 중 '무작위로 착출'하고 의경은 지원자를 상대로 소정의 시험을 거쳐 뽑게됐다. 또한 관계법에 의하면 의무경찰은 작전전경과는 달리 '치안업무보조'를 수행할 수 있는데, 그 주요 임무는 말할 것도 없이 시위진압이였으며 기타 교통요원, 행정, 컴퓨터 기능요원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전경의 숫자는 업무의 특성상 경찰청장이나 내무부장관(현 행정자치부 장관)의 요청이 없는 한 인력충원이 되지 못하지만, 의경은 일반 경찰에 채용된다는 메리트가 있음에도 시위진압 도중에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점차로 그 지원숫자는 줄었다.

또한 전경과 의경 사이에는 순경이상의 무술특기 직업경찰로 구성된 사복체포조 '백골단'이 당시 존재했다. 주요임무는 시위주동자 및 과격시위자를 체포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시위현장에서 시위학생 노동자와 물리적 접촉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됐다. 이후 백골단(전경 사복체포조)은 '91년 강경대 명지대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해체하게 된다.

당시 경찰은 시위진압 전경을 점차 경찰로 대체할 계획이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매년 3천여억원의 추가재윈이 필요해 난색을 표명했다.

결국에는 단순히 병역의무를 때우기 위해 전환복무중인 혈기왕성한 전경에게나 스스로 지원한 젊은 의경들 역시, 과잉진압을 자제하는 직업경찰관 같은 공복의식을 기대하기는 당초 어렵다는게 일반적인 지적이였다.

방어적 시위진압에서 공격형으로, 원조는 백골단?

91년도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은 '91년 노태우 정권에서 경찰에 의한 폭압적 시위진압은 진압방식을 방어형이 아닌 공격형인데다 백골단에 의한 시위자 체포에 따른 인센티브 부과 등이 원인이 되었었다.
이로인해 경찰의 시위과잉진압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자 그 동안 유지됐던 전·의경 제도가 다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전경은 본래업무인 대간첩수행업무보다는 시위진압에 계속 투입 되었다. 또 전경을 의경으로 교체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전경은 인력충원(병무청은 내무부장관(현 행자부장관)이나 경찰청장의 요청에 따라 수시로 모집 가능)이 용이한 반면 의경은 갈수록 지원자가 줄어 관철되지 못했다.

또한 전·의경의 탈영이 계속되면서 전·의경제도에 따른 모순점이 드러났으며,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전경들의 양심선언과 폭로가 잇따랐다. 양심 선언을 한 전경들은 전투경찰설치법 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은 '92년 노태우 정부는 의무전투경찰순경(의경)의 충원방식을 착출제로 일원화하는 등의 「전투경찰대설치법 개정안」과 「병역의무의 특례규제에관한 법률개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론이 의경의 강제 착출은 위헌이라며 반대하고 나서면서 정부는 기존의 전·의경 제도 2원화를 현행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80년대 군부독재 타도, 민주화 투쟁', '90년 통일·학원자주화 투쟁', '2000년대 신자유주의 투쟁'

국민의 정부 들어와서도 경찰연감을 보면 96∼2001년 4월 현재 전·의경 숫자는 5만명 수준으로 전경이 1만8천명, 의경이 3만2천명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 시위가 줄어들었다 해도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 비해 3천명 정도가 감소했을 따름이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대국민 치안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의무경찰제를 폐지, 정규경찰로 대체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지만, 오히려 증가된 화염병 시위로 인해 경찰청 화염병 전담 기동타격대가 지난 9일 발대식을 가졌다. 이들은 신체건강한 무술 유단자를 중심으로 선발돼 전국적으로 25개 중대 규모로 편성됐다. 과거에 해체되었던 백골단을 연상케하는 대목이다.

노태우 정부시절 시위대의 '군부독재 타도'라는 구호속에 시위진압에 나선 전·의경들, 문민정부 들어와 '통일·학원 자주화 투쟁', 그리고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노동자 대량해고에 맞서 정권의 방패로, 나아가 사회질서 유지라는 명목하에 전·의경은 시위진압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홍준철기자(jchong2000@ewinc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