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현편집국장칼럼]이용수의 기억과 윤미향의 정의
2020-06-01 임재현 편집국장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용수 할머니가 받은 피해를 콜 총리 부인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경중을 따지기란 어렵지 않다. 할머니는 나라 밖으로 끌려가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매춘을 강요받았다. 매춘은 자의에 의해서든, 강압에 의해서든, 당사자 여성의 자존을 허물어 뜨리고 정신마저 갉아 먹는다.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뒤 ‘개조사’라는 이름을 붙여 펴낸 책에는 유곽여성들을 갱생시키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는지 그 실상이 생생히 담겨 있다.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장기간의 학대를 생각하면 이용수 할머니도 콜 수상의 부인보다 더 극단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가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는 당당히 세상 속으로 걸어나와 일본의 전쟁범죄를 전세계에 알리는 운동가로 변모했다. 2017년 어느 행사에서 “설 쇠면 내 나이 구십이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활동가’ 하기 딱 좋은 나이다”란 인사로 박수갈채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지금 한국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더 이상 식민지 피압박 피해 여성 출신의 인권운동가로 추앙되지 않는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진 한편에서는 그를 음모론의 한 출연진쯤으로 여기고 목돈에 노욕이 든 노인네인 것처럼 업신여기기까지 한다. 신문지상을 장식한 이런 저런 기사의 정보를 종합하면 이 할머니를 둘러싼 이번 일에 특정한 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심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음모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이용수 할머니의 역사적 피해자격이 마치 온통 날조인 것처럼 매도하는 한국의 현실이 과연 합당할까?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지향하며 정론지임을 자부해온 신문이 만평까지 곁들여 조롱할 만큼 이용수 할머니의 음모는 확정적인가?
이용수 할머니는 아픈 기억을 이기고 살아 남은 것은 물론 전쟁과 억압의 책임을 고발하고 나섰다는 점만으로도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미향 국회의원은 피해 할머니들의 기억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전쟁과 여성 인권 유린 범죄에 대한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도 개인의 자격이 아닌 NGO의 대표로서 기부에 의한 재원으로 조직을 운영해왔다면 더 한 도덕성과 청렴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의와기억연대의 척박했던 간난신고의 초기 활동여건을 고려해 일정한 보상을 고려할 수도 있지만 여당의 비례대표 자리 정도면 가득 차고도 넘친다.
1992년 동두천에서 발생한 미군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 살해사건을 비롯해 한국은 얼마전까지도 주둔군의 범죄 행위로부터 자국민의 인권조차 지키지 못한 나라였다. 오늘의 인권 현실은 활동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 자부심이라면 굳이 검찰 수사에 기대야 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