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한 팩트시트, 과락 면한 수준…국회비준은 자충수"

"美 200억 달러 투자, 韓기업 우선…터프하게 관리할 것" "더 이상 대화 안 한다던 러트닉, 9·11추모참석이 전환점" "국회 비준은 자충수…협상 조항 스스로 못 박는 일" "다음 세대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협상…기업 경쟁력이 국력"

2025-11-17     김성지 기자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17일 라디오에 출연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하지만 협상 결과를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리 국력의 한계를 실감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CBS라디오 김현정의뉴스쇼 캡쳐]

한미 관세협상의 최전선에 섰던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관세협상을 소회하며 "처음엔 개운했는데 지금은 좀 씁쓸하다"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하지만 협상 결과를 보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리 국력의 한계를 실감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심장이 마르는 순간도 있었다"고 전한 김 장관은 "협상 이후에도 함부로 가지 않게끔 더 터프하게 해 나가겠다"고 피력하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관세협상 국회 비준에 대해선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장관은 1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대미 투자금은 협의위원회가 고려한 것을 투자위원회에 건네주고, 이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결정하는 구조"라며 "깨알 같은 디테일 중 하나는 구체적인 프로젝트 운영은 한국 매니저가 하도록 돼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문구를 1조에 넣기 위해 미국 정부와 눈치싸움을 벌였다고 전한 김 장관은 "상업적 합리성은 비즈니스적으로 합리적인지 보겠다는 것으로 프로젝트의 원리금을 회수할 정도의 현금 흐름을 우리가 창출할 수 있는지가 부록에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미 투자 기간 동안 원리금 회수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투자위원회가 판단하는 투자 대상에만 투자를 진행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애초에 한국 정부는 투자금 회수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투자하지 않도록 '상업적 합리성' 조항을 MOU 제1조에 포함시켰다.

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도 유망하지 않은 사업에 투자금을 넣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며 "제가 터프한 협상가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럴 조짐이 보인다면 더 터프하게 관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조항과 관련해선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적용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정부 간 공식 문서에 특정 국가 이름을 직접 넣는 것은 외교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어 '미국이 판단하기에'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 문구 때문에 한국이 대만보다 불리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 LMO(유전자변형생물체) 관련 비관세 장벽 완화 논란에 대해서도 선을 그으며 "쌀이나 쇠고기, 월령 제한 같은 부분에 대해 이면 합의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건 전혀 없다"고 못 박았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오후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 직전 포옹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 이상 대화 안 한다던 러트닉, 9·11추모참석이 전환점"

협상 상대였던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에 대해 김 장관은 "진짜 터프한 협상가"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김 장관은 "회의 중에 본인에게 불리한 흐름이 보인다 싶으면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그냥 벌떡 일어나 '너와는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다'며 나가버리곤 했다"며 "제가 달려가 '일단 앉으시라'며 붙잡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러트닉 장관이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겠다는 애국심과 열정만큼은 존경스럽다"며 "그런 상대를 상대로 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협상의 분수령이 된 대목으로 9월을 꼽았다. 당시 미국 측은 3500억 달러의 전액 현금투자를 고집했고, 한국은 외환시장 충격 등을 이유로 분납 구조와 통화스와프 등을 설득하고 있었다.

김 장관은 "그때는 우리 협상단이 미국에 가도 면담이 안 잡혔다. 실무자 미팅도 막히고, 제가 러트닉 장관에게 문자를 보내도 답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돌파구는 전혀 다른 곳에서 열렸다. 러트닉 장관은 과거 9·11 테러 경험이 있는데 그가 다니던 회사의 동료 직원 656명과 동생이 쌍둥이 빌딩에서 함께 근무하다 모두 숨졌고 이후 매년 추모 예배를 드려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김 장관은 "협상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겠다. 그저 9·11 추모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며칠째 침묵하던 러트닉 장관이 곧바로 'Yes, thank you(알았다. 고맙다)'라는 답장을 보내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김 장관은 "외부인이 그 예배에 참석한 건 제가 처음이었다고 들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그날 저녁 '내일 오후에 만날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다. 그 시점을 기점으로 분납 논의가 다시 살아났다"며 "세상을 바꾸는 건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는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온 국민의 성원과 기도가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주 APEC회의에서의 극적 타결 과정도 러트닉 상무장관과의 문자가 있었다. 회의 직전까지도 주요 쟁점이 해결되지 않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김 장관도 "당시만 해도 저희도 안 될 거라고 보고 있었다"고 전하며 APEC 개막을 앞둔 이른 아침, 러트닉 장관에게 "여기까지 잘 해왔으니 협상은 계속 이어가되, APEC 기간에는 양국이 동맹으로서의 체면을 지킬 수 있는 메시지를 내자"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다. 미국 측은 이 문자를 한국의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저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메시지를 깔끔하게 관리하자는 뜻이었는데 미국은 '여기서 더 밀리면 협상이 깨진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 같다"며 "그로부터 얼마 뒤 미국 측에서 한국 측 의견을 받아 들이겠다는 취지의 회신이 왔다"며 이후부터 협상에 진척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원들이 이날 발표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의 결과물인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사본을 열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회 비준은 자충수…협상 조항 스스로 못 박는 일"

김 장관은 국회 비준 논란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헌법상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야당은 비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법적으로 보면 이번 합의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비준 대상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법 논쟁을 떠나 우리가 스스로 협상 내용을 국내법으로 못 박아 손발을 묶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배분비율 5대5 조항과 관련해서도 "이 부분은 저도 아쉬워하는 대목인데 비준을 해버리면 앞으로 더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진다"며 "조약 비준은 국내법적 효력을 갖기 때문에 그 안에 적힌 조항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일본도, 미국도 비준을 하지 않았다. 우리만 자발적으로 손발을 묶는 건 전략적으로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재정 부담과 관련된 부분은 별도의 특별법을 통해 국회의 동의를 거칠 계획이라고 전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미 관세협상 팩트시트 및 MOU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연합뉴스]

"다음 세대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협상…기업 경쟁력이 국력"

김 장관은 이번 협상을 "보이지 않는 경제 전쟁의 한 장면"으로 규정했다.

그는 "물리적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들도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충돌은 관세와 투자, 공급망을 둘러싼 경제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며 "그 전선의 최전방에 서 있는 건 우리 기업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고 산업의 힘이 커질수록 어느 나라도 쉽게 한국을 대할 수 없게 된다"며 "국민들께서 우리 기업을 더 응원해 주시고, 정부와 기업이 함께 국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장관은 "이제 남은 건 세부 프로젝트를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어떻게 설계하느냐, 자동차 관세의 소급 적용을 위해 국회와 얼마나 빨리 법을 정비하느냐 같은 후속 작업"이라며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결국 국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이번 협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른 경기였다. 다음 세대 협상가는 더 평평한 운동장에서, 더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도록 산업과 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폴리뉴스 김성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