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해인의 문학세계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는 시를 써서 사랑을 받은 이해인 수녀가 동시 낭송 음반을 출시했다. 특히 이번 동시 낭송 음반은 시각장애인, 글자를 모르는 아동들에게도 이해인 수녀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해인 수녀가 동시 낭송 음반을 출시했다. 동시 낭송 음반인 <이해인 수녀가 읽어주는 엄마와 분꽃>은 ‘별을 보며’, ‘나무가 크는 동안’ 등 13편의 시와 연주곡 등 총 14개의 트랙으로 구성됐다.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이번 동시 낭송 음반에 실린 작품은 이해인 수녀가 1992년에 펴낸 동시집 <엄마와 분꽃>에 담겼던 것들이다. 현재 이해인 수녀는 암 투병 중이다. 하지만 동시 낭송 음반의 판매수익금 중 일부를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 등의 사업을 하는 푸르메재단에 전달할 예정이다. 이해인 수녀가 전달할 수익금은 ‘민들레기금’으로 만들어져 재활병원의 시설, 뇌성마비 어린이의 보행 보조기구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이해인 수녀의 인생

이해인 수녀의 공식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이해인 수녀는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아버지 이대영과 어머니 김순옥 사이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서울 청파동에 살 때인 6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에 부친이 납북되는 화를 당했다. 
 
1952년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부산에 위치한 성남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58년 서울에 위치한 창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풍문여중에 입학했다. 풍문여중에서 특별활동반으로 문예반에 들어가 임영무 선생님의 지도하에 이해인 수녀의 인생과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친구들과 교제했다.
 
1960년에는 부산에 위치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언니의 권유로 동래여중으로 전학을 갔다. 이해인 수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한 학년을 월반하려는 목적으로 전학을 갔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1961년 동래여중을 졸업하고, 1964년 김천에 위치한 성의여고를 졸업했다. 1963년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차지하며 시인으로의 파란 싹을 보여줬다.
 
그해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했다. 1968년에 첫 서원을 받고, 1968~1970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에 소임해 수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 <소년>에 동시인 ‘하늘’, ‘아침’ 등으로 추천 완료돼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5년 필리핀의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종신서원과 더불어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했다. 
 
1976~1978년 부산 성분도 병원에 소임하고, 1978~1982년 수녀원 교육팀에서 일했다. 1985년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985~1987년 수녀원 자료실 담당으로 소임을 다했다.
 
1988~1990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신심분과에 소임하고, 1990~1991년 수녀회 설립 60주년 준비위원으로 일했다. 1992~1997년 수녀회 총비서로 소임하고, 1997~2000년 수녀원 내 문서선교실에서 소임했다. 
 
이해인 수녀의 문학세계

이해인 수녀의 문학세계, 시세계는 이해인 수녀의 공식 홈페이지 ‘수녀님에 관한 글’ 게시판에 있는 ‘‘민들레의 영토’에서 꽃피워가는 ‘작은 위로’의 영성’이라는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이해인 수녀가 직접 쓴 이 글은 그녀의 삶과 시에 대한 한 편의 회고록이자 기도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이다.

“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숨 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드는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라는 고백에서 이해인 수녀에게 시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수녀로서의 인생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흔히 작가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작가의 인생이다. 작가는 자기 나이대의 인물을 우호적으로 묘사한다는 말처럼 작품과 작가의 인생은 때려고 해도 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이해인 수녀만의 경우는 아니다. 작가도 사람이기 때문이며, 문학작품은 작가의 인생 안에 속한 것이지 인생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이해인 수녀는 “시는 저에게 꿈을 꾸게 만드는 하나의 놀이이고 노래였다”고 고백했다. 이어 “전쟁의 폐허 속에 다들 우울하고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언니와 오빠가 낭송하는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의 시들은 저를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줬다”고 전했다.

한편, 이해인 수녀를 강하게 이끈 것은 인도의 시성이라고 불리는 타고르다.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집인 <기탄잘리>를 읽으면서, 시집에 나오는 갈대피리가 된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타고르가 영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노래했던 것이 이해인 수녀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타고르의 사색적인 시들이 이해인 수녀의 시세계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또, 이해인 수녀의 첫 시집인 <민들레의 영토>에 대해서는 “‘민들레의 노래’라는 혼자만의 노트를 만들어 더러 시를 써두곤 했는데 이것이 훗날 <민들레의 영토>로 세상에 선보인 첫 시집이 됐다”고 이 글에서 밝혔다. 너무나도 유명한 <민들레의 영토>라는 제목은 홍윤숙 시인이 지어줬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고, 시를 써온 이해인 수녀는 시대의 범죄자인 신창원의 마음까지 녹였다. 지난해 8월 24일 이해인 수녀는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신 씨가 한 달여 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기도를 부탁하는 글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이어 신창원 씨의 편지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다며 한탄하는 내용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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