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치 대의기능 상실, 국민의식 바꾸고 복지국가 밀어갈 새로운 에너지 필요”

사진=이은재 기자
▲ 사진=이은재 기자
<폴리뉴스>와 월간 <폴리피플>은 지난 9월 16일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상이 제주대 교수를 모시고 최근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담배값 인상과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 등 증세문제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이상이 대표는 담배값 인상에 대해서는 “담배가 국민 건강을 해치고 백해무익하기 때문에 흡연율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서도 “정부의 담배값 인상안은 1차 목표가 세수를늘 늘리는 것이고 흡연율 낮추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꼼수 증세”라 비판했다. 이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공약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공약을 팽개치고 다시 ‘줄푸세’로 돌아갔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지재원 확충을 위해 국민이 세금을 더 부담해야 하는데 소득세제를 개편하여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상위 10%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경제의 형평성을 높이는 방안이라 강조했다. 여야 정치권이 복지재원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 개진을 하지 않는 것은 정치권의 책임 방기라 지적하면서 시민 사회에서라도 이 문제를 적극 제기해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지금 사회 전체적인 수요와 흐름은 복지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정부에서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역행하는 것이 많다. 사람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서비스인 의료분야에도 민영화를 도입해서 경쟁 논리로 가겠다고 한다. 교육도 이미 상당히 그런 수준이다.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잘못된 것이고 안타까운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경선을 하던 2007년 시기에 ‘줄푸세’ 노선을 내세웠다.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치를 세운다는 아주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논리이다. 작은 정부, 정부 크기를 줄이고 시장의 자유를 대폭 확대하는 큰 시장 논리이다. 그 논리를 지난 대선 시기인 2012년에는 포기하고 한국형 복지국가로 가겠다고 했다. 경제민주화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다시 2007년으로 돌아갔다. 국민을 기만하고 속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안타깝다. 박 대통령이 2012년 내세운 공약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다음에 누가 집권하더라도 그 수준으로 가야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복지국가를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2012년 내세운 복지공약은 아주 소중한 우리 사회의 성과물이다. 누가 다음에 집권하더라도 그것을 해내야 하고, 그리고 더 나가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박 대통령은 5년 세월을 까먹을 것이고, 까먹은 정도가 아니라 퇴행시킬 것이다.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의료민영화에도 결사 저항해야 한다. 5년 세월을 상당히 허비하기는 하겠지만 이것을 고치는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는 덜 망가지게 지켜야 한다. 한국의 건강보험제도와 지금 수준의 한국 의료의 비영리성 정도만이라도 지켜내야 한다. 의료민영화나 철도민영화,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비합리적인 규제완화정책은 비이성적이고 불공정한 것이다. 이런 규제완화정책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저항을 조직해야 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박근혜정부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야당이 지금 담배세 증세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지만, 복지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전면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증세를 들고 나왔다가는 뭇매를 얻어맞는 것 아니냐는 의식을 하는 것 같다. 복지를 후퇴시켜서는 안 되고 복지 재원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한다면 어떤 세제로 어떤 항목들을 증세해서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정치의 몫이 그런 것이 아니겠나.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내도록 하자는 것이 야당이라면, 그 속도와 정도를 완화시키자고 하는 것이 여당일 수 있다. 이번 담배세 인상 논란을 그런 논쟁으로 가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 대선 때 야당은 대안세력으로서의 신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때문에 패배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후보가 그 당시에 보여줬던 모습들은 죽어가던 한나라당의 하얀색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선별적 복지를 하자고 했던 사람들이 보편적 복지를 갖고 나오고, 경제를 자유화하자고 했던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오는 등 모든 것들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것을 박근혜 후보가 자산으로 삼아 그동안 쌓았던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믿어 달라’고 했고 그것이 먹혀들어서 여당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것이다. 그때 야당이 총선과 대선에서 다 이긴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는데 거꾸로 여당이 다 이겼다. 그 패배 이유가 야당의 신뢰의 문제, 대안세력으로서의 책임성 문제에서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복지 재원 문제이다. 야당이 복지국가를 하겠다고 하고 프로그램을 제출했지만 이것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재정을 마련하고 어떻게 집행하겠다고 하는 구상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애드벌룬만 띄워놓고 숨어버렸다. 야당이 굉장히 비열했던 부분이 어느 날 갑자기 복지를 숨겨버리더니 경제민주화만 꺼내놓았다. 그런 정치 공학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이 분들이 보편적 복지를 숨기고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을까. 경제민주화는 돈이 드는 일이 없다. 정부가 규제만 하면 된다. 순환출자는 언제까지 하지 말라고 규제하면 되고, 모기업이 하청기업과의 관계를 공정하게 하도록 규제만 하면 되는 것이 경제민주화 입법이다. 돈이 들 일이 없는 것이다. 국민들은 박수를 치면 되니까 좋은 것이다.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절차상 조치 몇가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민주주의는 그런 조치와 함께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지원, 재원 마련 등이 다 됐을 때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분리해 버린 것이다. 돈 많이 든다고 복지국가를 숨겨버리고 경제민주화만 살짝 꺼내서 2012년 총선 때 그것만 계속 얘기했다.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재원 문제를 꺼내면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 두 부류가 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 중에는 재원을 더 마련해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 조세부담율을 높이는 것을 반대하는 부류가 많이 있다. 이것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러 명의 의원들로부터 이런 뉘앙스를 받았다. 새누리당 소장파보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보수적이다. 이런 분들이 민주당 내 국회의원들 중에 굉장히 많다. 일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의원들 중에도 담세율을 높이는 것이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표가 떨어진다고 하는 정치공학적인 계산을 앞세우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민주당 내의 중도 우파와 중도 진보파 사이에 조세 문제는 숨겨버리기로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려면 보편적 복지를 가급적 들고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 박 대통령이 그렇게 약속했던 한국형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철회하거나 하나하나 후퇴시키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논평 정도로 비평만 했지 전면적으로 당력을 동원해서 대안을 내놓고 싸울 궁리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럴 의사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런 의사가 없냐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야당 중도파에 가까운 의원들 60~70% 정도는 증세 문제에 대한 생각이 새누리당 의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로는 표 떨어진다고 하지만 자기들의 지지기반이 사회적 엘리트들과 동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30~40% 정도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야당 의원들은 상당수가 표 떨어진다고 하는 정치공학적 논리에 갇혀 있다. 야당 의원들 중 10명 내외 정도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 진정성을 갖고 이것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분들의 목소리는 거대 정당 내에서 10%도 되지 않아서 공론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사회가 이 일을 해야 한다. 여야 정당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국민들의 정서이기 때문에 국민들과의 담화, 사회적 대화를 시민사회가 역할을 해서 주도할 수밖에 없다.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것은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인데 정치가 해주지 않으니까 시민사회가 나서서 떠들고 있고, 언론이 공론화하고 있다. 

언론이 공론화하는 것을 정치권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어제 한겨레신문 1면 톱으로 나온 기사 타이틀은 ‘법인세와 소득세를 올려라’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대안이 무엇이냐’고 해서 소득세제 개편밖에 없다고 했다. 기사를 잘 구성했는데 우리는 소득세 비중이 굉장히 낮다. GDP의 3.8% 수준이다. 지난해 우리 국민 전체가 낸 것이 총 국세 수입의 21% 밖에 되지 않는다. OECD 국가들 평균은 GDP의 8.5%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OECD 평균의 반도 되지 않는다. OECD 국가 국민들이 내는 소득세에 우리나라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40% 수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법인세는 OECD 국가들과 우리가 비슷한 세율로 내고 있지만 실효세율이 낮은 문제가 있다. 법인세와 소득세 등 소득세제를 누진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상위 10% 고소득자들이 소득의 45%를 가져가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미국과 한국 밖에 없다. 우리사회는 상위 10%와 나머지 90%로  쪼개져 있다. 10:90의 사회이다. 이 10%가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그래서 이 돈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우리 경제의 취약한 부분을 개선해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이 튼튼해지고 다시 복지와 경제가 활성화되면 세금을 더 낼 수 있는 중산층이 늘어날 것이다. 중산층까지 세금을 더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면 OECD 국가들 평균 수준으로 우리도 갈 수 있다. 

-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로 접어들었고, 복지수요는 늘어났다. 고령화시대가 계속 되면 재원을 마련해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일각에서는 복지 정책만 갖고 되는 게 아니고 기본소득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해서 기본소득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당장은 복지국가를 전면적인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 흐름과 방향으로 봤을 때 어느 시기까지 이것이 가능한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또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고령화시대에 대한 걱정은 합리적인 우려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고민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영미식 모델과 북유럽식 모델을 비교해보면, 사실 영미식 모델은 복지를 지속적으로 늘린다면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돼 있다. 특히 영국이 대표적이다. 미국도 그래서 복지를 많이 줄였다. 미국도 뉴딜정책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복지가 굉장히 늘어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90년대에 복지가 확 줄어들었다. 1990년대에도 복지를 많이 줄였다. 영국도 17년 정도의 보수당의 대처 정부를 지나면서 복지를 엄청 줄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복지 비중이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런 우려가 나왔던 것이 미국과 영국 복지가 선별적 복지를 시행한다. 사회적으로 탈락한 사람, 경쟁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대해서 몰아주는 방식으로 하니까 여기에 의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자꾸 늘어나고 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니까 이분들의 복지에 대한 기대치가 자꾸 높아졌다. 그래서 복지에 대한 추가비용은 자꾸 커지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부조화 현상이 벌어지고 근로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만들어졌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조건이 만들어지면 일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이 크지는 않았지만 초기적인 증상들은 꽤 많이 나타났다. 영국의 보수당은 이런 초기적인 증상들을 빌미로 집권했고 집권 이후 복지를 대폭 줄였다. 

그런데 영미식이 아니라 북유럽식의 스웨덴 같은 나라는 복지에 투자를 하는데 선별적인 복지에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복지에 투자했다. 돈을 쓰는데,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 출산, 보육, 교육, 직업훈련, 일자리 창출, 노후보장 등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누구나 거쳐야 하는 인생의 모든 과정에 대해 기회를 동등하게 갖도록 하기 위해서 보편적 복지를 하고, 누구나 일자리를 통해 자기 삶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니까 오히려 근로 유인이 높아지는 것이다. 누구나 일을 한다. 고용률이 영국이나 미국보다 북유럽이 높다. 그런 조건을 만들어주니까 선별적 복지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확 줄어든다. 선별적 복지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어려워진 사람들이고, 선별적 복지에 의존하다가 복구하면 빠져나가버린다. 영국이나 미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선별적 복지에 많은 비중을 두고 보편적 복지를 경시하는 나라들은 선별적 복지에 한번 들어온 사람들은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빠져나갈 수 없는 분들이 주로 들어왔다. 미국은 훨씬 심각하다. 우리는 선별적 복지의 혜택을 받고 있는 분들의 비중이 적다. 전체 인구의 3% 정도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의료보호를 받고 있다. 미국은 14%가 받고 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선별적 복지 중심으로 확대하는 나라는 엄청난 재원이 들어가면서도 재원을 부담하는 사람과 혜택을 받는 사람이 완전히 분리돼서 양자 사이에 끊임없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심각해진다. 

영국과 미국의 선별적 복지모델은 실패했고, 보편적 복지 모델로 가는 것이 추세이다. 보편적 복지 모델로 가면 사람에 대한 보편적 투자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역동적 경제를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성장률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성장률이 더 높아지고 전반적인 고용률이 높아진다. 우리나라 고용률이 63%인데, 스웨덴은 74%이다. 고용률이 이렇게 높아지면 세수가 더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큰 문제없이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이렇게 가야 한다. 이것이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이고, 이 논리가 시민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인정을 받고 있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보수학계에서도 일리 있고 앞으로 그렇게 가야 한다고 한다. 야권 진영에서는 대부분 이런 역동적 복지효과 논리를 수용하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대비해서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우려해야 한다. 그런데 보편적 복지 중심, 사람에 대한 투자 중심 모델로 가면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기본소득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진영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같은 진보진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분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방식이다. 전 세계적으로 형편없이 가난한 후진국 중 복지가 전무한 나라에서 일부 지역, 일부 시점에 실험해볼 수 있는 모델이다. 브라질의 경우 절대 빈곤율이 30~40% 되는 가장 가난한 지역, 복지시설이 하나도 없는 지역에 공공복지를 설립하고 제도화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들어간다. 그래서 엄두를 못내는 시점에 기본소득을 실시하면 민간자본이 들어가고 시장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복지수요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유효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 가야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국가 모델은 독일을 넘어 스웨덴으로 가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우리 실정과 맞지 않다.

-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제 실시에 대한 주민투표를 했다고 하던데?

스위스는 우리와 아주 다른 모델이다. 스위스는 독특한 나라라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또 한두개 칸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갖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인구 5,000만명 규모의 국가에서 그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일인당 얼마를 나눠줘야 하나. 50만원씩 다 나눠주려면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그 재원을 마련하려면 기존의 복지를 다 철폐해야 한다. 다 철폐하고 재원을 나눠줬다고 하자. 그것을 우리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도박을 한다든지 술을 사먹는다든지, 그 사람의 독특한 기호 때문에 여행을 간다든지 해버리고, 정작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는 돈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기본소득제는 부분적 취지를 살리는 게 옳다. 모든 노인들에게 매월 20만원씩 돈을 드리자고 한 보편적 노후보장제도, 기초연금제도는 기본소득제의 취지를 살린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전면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이나 특정 인구에 하는 것이 좋다. 가령 15~18세 이하 어린이나 청소년에 대해 매월 10~20만원씩 보편적으로 아동수당을 제공한다고 하면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도 기본소득 매커니즘에 들어가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일률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윤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데 굉장히 잘못된 판단이다. 기본소득은 공공복지 시스템을 해체하고 시장의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으로, 평등주의 차원에서는 극좌 논리이다. 실질적인 작동원리는 극우 논리와 뒤범벅이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기본소득론자들 마다 말이 조금씩 다르다.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아동수당이나 기초연금처럼 노후보장을 위해 특정인구, 장애인 등에 일률적으로 기본소득 금액을 지불하는 것은 보편적 사회수당이라는 방식으로 지지해왔다. 우리가 주도해서 몇 년 간 어른들에게 기초연금을 2배 이상 드리자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분들과 같이 손을 잡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급진적으로 해석해서 획일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일정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면 기존 복지국가 모델과 굉장히 충돌하고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 조세형평성 측면에서 ‘부자들은 세금을 잘 내지 않는데 왜 우리는 꼬박꼬박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월급쟁이는 유리지갑이고, 자영업자나 다른 사람들은 적게 내는 것 아니냐는 불신도 있다. 소득에 대한 조세를 늘리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대담하고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얘기 해야 한다. 사회세력간 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정치권이 불신을 받고 있고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영역일 수밖에 없다. 과정적으로는 밖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고 역할을 할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은 정치 영역에서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여야 정치권이 조세정치, 세금정치에 대해 이중적이고 무능한 자세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국민들 의식이 왜곡돼 있다. 본인들은 인지를 하든 못하든 굉장히 왜곡되어왔다. 우리나라는 50-20클럽에 들어가 있다. 인구가 5,000만명 이상이면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 이상인 나라는 전 세계에 7개 국가 밖에 없다. 한국은 7대 국가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일곱 번째로 50-20클럽 멤버가 됐다. 이제 우리나라는  일제에서 해방되고 6․25 동란을 겪던 시기의 국가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한국을 만들었다. 이렇게 새로운 한국을 만드는데 고생한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들에게 우리 사회는 굉장히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 사회 산업화 세대에 대해 민주화 세대가 가져야 할 경외심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세대가 산업화 세대에 대한 경외심이 많이 부족한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도 민주화 세대가 이뤄놓은 새로운 성과물을 인정해야 한다. 산업화 세대들이 주로 역할 것이 60년대 70~80년대까지라고 하고, 민주화 세대가 주로 노력한 것이 80~90년대라고 본다면 외환위기를 지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이 두 세대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없어져버렸다. 시대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보편적 복지이다.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질 높은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기에 우리 국민들의 조세에 대한 의식이 왜곡된 채로, 오히려 왜곡이 한 15년 사이에 굳어진 채로 더 심화됐다. 이것을 빨리 깨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그런 자부심을 갖는 만큼 복지국가로 더 나가기 위해 사회적 부담을 해야 한다. 사회적 부담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 공공성의 수준을 결정한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수입 중 세금으로 내는 비중이 바로 사회 공공성의 크기이다. 이 인식이 전도되거나 왜곡돼 있다. 국민들이 공공성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이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내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세정의가 왜곡돼 있다’, ‘국가를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물론 이런 핑계거리를 만들어주고 의식이 왜곡되도록 도와준 것이 기성 정치권이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 왜곡된 국민 여론을 개선할 수 있도록 우리 정치가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정치가 그런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 일각에서 이런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해법은 정치를 통해 나와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 공간도 결국은 국회다. 정치가 이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 민의를 최대한 대의하고 수용해서 사회적 합의를 모아내는 정치역량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정치는 그런 대의 기능 자체가 마비돼 있다. 이런 대의 기능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 패러다임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이것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여야 정당 구도가 수용할 수 있는 국민들의 민의는 극히 미미한 부분이다. 특히 서민과 노동자 다수의 힘없이 살아가는 국민들 의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대의되는 새로운 패턴의 정치질서까지 염두에 둔다면 새로운 복지국가로 나가고자 하는 에너지, 정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새로운 대안들이 새로운 정치판을 구성하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기존 여야 정치권에 인적으로든 정책적으로든 밖의 에너지를 다시 수혈하는 방식으로 한다면 그 수혈은 썩은 피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거의 수십 년 동안 봤다. 아마 시민사회에서도 기성정치의 들러리를 서거나 기성정치에 수혈되거나 기성정치에 제안하는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참여가 열릴 수 있도록 하려면 기성정치에 거대한 변화가 요구되는 환경과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 긴 시간 인터뷰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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