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가 물었다. 

"차기 정권을 잡았다 치고, 조각을 한다면 어디에 누구를 배치할 지, 떠 오르는 사람 한번 얘기 좀 해 주라"

친구는 나이는 나와 같지만 국회, 정부, 청와대 경험이 꽤 풍부한 편이다. 한 때는 주요 국정 포스트와 사람을 매칭시키는 일에 실제 관여도 해 봤다. 친구가 이런 요상한 질문을 한 것은 누구의 사주를 받아 대선 캠프를 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펼치고자하는 '전국적 국가개혁신운동'에 필요한 경세가를 찾기 위해서다. 내가 오랫동안 국가비전, 전략(경세담론)을 고민하면서 여러 분야의 경세 담론을 살펴온 것을 알고, 내 눈에는 어떤 사람이 보이는 지를 알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경세가 내지 선수는 학계에서 인정 받는 학자/연구자가 아니라, 정책과 정무와 행정 능력(조직 장악력)을 고루 갖춘, 한 부처를 능히 끌어갈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별로 머뭇거림 없이 "그런 사람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고 답했다. 

새누리/보수 쪽은 대략적이나마 정책적 컨센서스도 있고, 또 정책 패러다임 전환 없이 대통령 (부처)업무 보고 수준에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기 때문에--이게 지금의 4대 개혁론이다--, 주요 국정 포스트에 분야별로 열 명 정도의 후보군을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중앙부처의 차관, 실장, 국장, 국책연구원장등도 후보군에 얼마든지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정부 부처를 통해 이미 구현되고 있는 주류적 정책 패러다임과 관성을 바꾸려고 한다면, 당대의 정책적 경험, 지식, 지혜와 정치적 상상력을 총화한 종합 설계도(플랫폼) 없이는 조각 자체가 불가능하다. 요컨대 주요 국정 포스트를 통해 수행할 개혁(일)의 내용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라는 얘기다. 새로운 국가비전/전략=플랫폼을 공유하기만 한다면, 일에 맞게 30대 초반 청년이나 지방의원을 장관으로 발탁할 수도 있고, 외국인을 수입할 수도 있고, 관료나 교수(학자)나 기업인을 쓸 수도 있다. 물론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사람이라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일을 보지 않고 주요 국정포스트를 그 분야 유명인(세계적 논문을 썼거나, TV에서 입담으로 인기를 얻은 사람 등)에게 맡기면, 날만 세면 엇박자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2010년 말인가 2011년 초인가 오연호 대표가 오마이뉴스 홈페이지를 통해 '드림 내각' 추천/투표 놀이를 준비할 때도 내게 꼭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나는 비슷하게 답변했다.

이런 놀이를 하면 노동부 장관 하면 심상정, 노회찬, 은수미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이들이 밀어붙일 정책이 무엇이겠는가? 뻔하다. 우리의 생산력 수준이나 경제환경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표준(권리,이익)을 누리고 있는 존재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국민세금과 규제에 기대어 사는 공공부문 주변(비정규직?)에게 이 잘못된 표준을 확대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30년 동안 추구한 진보 아닌 진보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피골이 상접한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서 조직노동과 공공부문 양반들의 배를 채우는 짓 아닌가? 

국정포스트를 '가문에 영광'을 안겨다 줄 벼슬(경력)처럼 생각하면, 조선시대가 재연 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장과 서울지검장을 합쳐놓은 한성판윤은 515년 동안 1930번의 취임식이 있었다. 평균 임기 4개월. 1일~10일간 근무한 자가 93명이었다. 이렇게 되면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다. 조선시대는 아전이 판을 쳤을 것이고, 지금이라면 직업관료가 판을 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관직이나 의원직은 조선시대 벼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치, 비전을 구현,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노동개혁이나 심상정, 노회찬의 철학, 가치, 정책패러다임에 대해서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 내가 오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틀리지 않는 것은, 일이 먼저고 사람은 나중이며, 자칭 민주 진보 개혁 세력은 일에 대한 컨센서스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일이란 대한민국이 어디쯤 있고(위치감각), 어디로 갈 것인지(방향감각)다.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 저성장, 지속가능성, 평화와 통일 문제 등에 대한 종합적 해법 내지 정책적 컨센서스다. 현세대, 미래세대를 아울러 5천만 혹은 8천만명에게 자유, 정의, 풍요, 안정을 보장할 대안 패키지다. 
 
내가 볼 때 조선 유교체제에서 계승, 발전시킬 합리적 핵심 중의 하나는 군주의 계보인 왕통(王統)과 더불어 성현의 계보인 도통(道統)을 존숭한 것이다. 왕통은 종묘로, 도통은 문묘로 존숭한 것이다.  조선시대 도통은 사상적, 학문적 권위의 상징으로 왕통과 더불어 하나였다. 그래서 격렬한 권력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율곡은 문묘에 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도통을 국가=왕이 공인하면서 생긴 추태다. 물론 이건 계승,발전시킬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통이 왕통을 계도하고 정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유효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왕통은  주요 정당들과 여기서 배출된 대통령-국회의원-지자체장 등이다. 바로 현실 권력이다. 물론 이것이 엉망진창이라 대한민국이 그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도 헬조선이니 개한민국 소리를 듣고 있지만......그런데 왕통의 향도이자 거울이자 참모(자문역)인 도통에 해당되는 것은 아예 없다. 사상이념적, 정책적 권위(현자) 집단이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권력만 잡으면 거대한 인재 풀(?)에서 얼마든지 발탁해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의 대통령 업무 보고서나 예산서라도 한번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업무가 너무나 다양하고 치명적이다. 삐끗하면 용산참사, 광우병 사태 같은 것이 일어날 정책적 화약고가 한 둘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엄청난 기회나 이권을 안겨 줄 수도 있다. 당연히 강단 교수/연구자로는 어림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수백 수천명의 전문가=관료들이 일하는 정부 부처를 지휘할 리더십이나 안목을 키우는 시스템 자체가 없다. 그러니 정권 출범 후 한 두 해가 지나면, 제일 잘 훈련된 관료들이 주도하는 것이다. 자기 실력이 너무 안되서 밀려난 강단파/캠프파들이 '저 정권은 관료에게 포획됐다' 어쩌구 하면서 돌이나 던지는 것이다.

친구와 나눈 얘기의 결론이다. 

정권 장악 후 제대로 된 조각을 위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 정당을 위해서도, 국가개조의 비전전략(플랫폼)이라는 일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정부 부처를 지휘할 역량은 강단에서, 연구실에서 길러지지도 않고, 또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이 타고갈 새로운 플랫폼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페비안 소사이어티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발전하면 일종의 도통이 될 수가 있다. 민주국가에서 도통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다. 사상이념 시장과 정치(선거) 시장에서 경쟁하고 검증 받는 것이다. 조선시대와 달리 도통의 힘은 월등히 커질 수 있다. 사실 진짜 왕은 정당, 대통령,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설득하고 일깨워서, 따지고 보면 그 신하에 불과한 정당, 대통령, 국회의원 등을 계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도통이 바로 서면, 대한민국 발전의 킹핀이자 숙원인 정당들도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8월이 가기 전에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파티라도 하면 어떨까 한다. 학위나 직업적 요구에 의해 책(경세담론)을 쓴 사람(교수,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등)이 아니라, 아무도 쓰라고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발을 딛고 선 현장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세워 책을 쓴 사람들은 우선 초청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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