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 지난 2000년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의 총선참패 후 이인제 당시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이 “지는 해”라고 하자, JP가 한 말이다. 작년에 나온 JP회고록에서도 “나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고 다시 썼다. 그에게 ‘서산을 붉게’는 각별한 모양이다. 지난 5월 28일 자택으로 자신을 찾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JP는 “결심한대로 하시되 이를 악물어야 한다. 내 비록 힘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돕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의 반기문을 있게 한 노무현정부의 모태인 민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거론되는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기에 쓰는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지난 5월 유엔행사 차 귀국한 반 총장이 열 일 제치고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JP를 찾아 눈도장 찍은 것이나,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돕겠다”는 JP나 지역주의에 젖어있기는 매 한가지다. 자신이 서산을 물들이는 건 무망해졌으나 충청도 후배인 반 총장에게 “이를 악물라”며 마지막으로 돕겠다는 건 이른바 ‘충청 대망론’과 함께 전형적인 지역주의의 발로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출신지별로 돌아가며 한 번씩 맡는 친목회장 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가 싶다.

한국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기형과 왜곡을 초래한 ‘3당합당’과 ‘DJP연합’을 거치면서 “JP를 붙잡으면 정권을 잡는다”는 말이 생겼다. 반 총장으로서는 충청권 맹주를 자처했던 이 노정객의 존재가 중요했나 보다. 일견 이해는 된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친지와 고향 어른들 찾아가 신고하고 상의하는 것, 동방예의지국에선 미덕이니까. 

반 총장이 한 가지 놓친 게 있다. JP가 YS, DJ와 함께 전국을 3분하던 시절은 이미 20여 년 전에 끝났다. JP는 누렇게 바랜 오래 전 달력이다. 지난 2012년에 8개월 간격으로 치러진 총선과 대선, 그리고 5개월 전의 4.13총선에서 확연히 드러났듯, 지역 간 대결 보다는 세대 간 대결이 승패를 갈랐다는 건 수치로 확인됐다. 반 총장이 만사를 제치고 JP를 찾은 건 보수진영에 대한 러브콜로도, 한 때의 충청권 맹주에 대한 눈도장으로도, 60대 이상 장-노년층에 대한 ‘신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반 총장으로서는 ‘일석삼조’라고 생각했음직 하다. 

자신의 출신지역인 충청권의 지지를 JP라는 구 시대 상징을 통해 다진 뒤, 그를 대선 무대로 호출한 새누리당 친박계를 통해 영남지역과 연합하면 대권이 가능하리라는 계산은, 지난 시절의 ‘관습적 산수’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JP가 누렇게 바랜 달력이듯, 이 산수 역시 지난 15년 간 급변한 한국정치 지도를 오독한 것이다. 지역별 유권자 수의 덧셈 뺄셈만 있는 산수로는, 세대-계층간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해 고차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운 ‘대선 수학’을 통과할 수 없다. 

추석을 앞둔 지난 15일, 미국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 일행에게 반 총장은 “내년 1월 중순 이전 귀국해서 국민들께 보고드리겠다”고 명토박아 말했다. 실질적인 대선 출마선언이다. 그의 대선가도에는 여러 가능성과 숙제가 동시에 있다. 그를 호출한 친박계의 등에 업힌 채 이탈자 없는 현 새누리당 전체 세력의 후보가 되느냐, 꽃가마가 아닌 경선전에 뛰어들어 난타전을 치르느냐, 아니면 현재의 정당구조 밖에서 일단 시작하느냐…. 맨 마지막 경우는 현실적 여건이나 미래에 대한 가능성 측면 모두에서 무망해보인다. 

반 총장이 넘어야 할 고비는 많다. 
첫째, 그는 한 번도 세밀한 공개검증을 받은 바가 없다. 국민들은 관료 시절의 출세가도와 명성만 알았지, 막상 정치인으로서의 내공이나 실력을 가늠해볼 기회가 없었다. 현미경검증이 시작될 경우, 어떤 변화가 생길지 누구도 모른다. 그렇게 강고하던 ‘이회창 대세론’도 선거 한 달 전 터진 아들 병역비리로 물거품이 돼버렸다. 

둘째, 마땅한 후보감이 없어서 급히 차출된 후보는 정치적 자생력을 의심받게 마련이다. 최근에 대통령을 지낸 세 사람,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의 경우 정계 입문 후 14~5년 만에 대통령이 됐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어쨌거나 간에 ‘뭔가’를 보여왔다. 반 총장에게는 그 뭔가가 없다. 유엔사무총장이라는, ‘단군 이래 첫 타이틀’이 실질적으로 유일하다. 그 타이틀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큼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의전적이고 형식적인가. 

셋째, 10년간의 국내 공백기가 ‘2017 대선’의 시대정신과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하리라는,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추측이다. 한국인 출신 유엔사무총장으로서 한반도문제에 관해 그에게 걸었던 기대는 컸다. 그러나 그의 방북은 번번이 북측에 의해 거절됐고, 그의 사무총장 임기 중 ‘그의 손으로’ 한반도문제 돌파구가 마련되리라는 기대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네째, 고루하다. 그간의 언행과 동선 등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아직도 3김시대  쯤에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 싶다. 관료, 그중에서도 보수성이 특히 강한 외교관 출신인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 고루함으로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국제사회에서 일고 있는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자질과 성과에 대한 논란은 마땅한 ‘저울’이 없으니 일단 차치하자.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그의 내치 능력과 내공이지 않은가. 

반 총장이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찾거나 신경써야 할 곳은 신당동JP나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비근한 예 한 가지. 그가 지난 5월 방한 시 묵었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세월호유가족들이 2년 넘게 노숙하고 있는 광화문광장까지는 걸어서 고작 10분 거리였다. 몸으로 지도력을 보일 때 리더십은 형성되고 확산된다. 

내년 1월 그가 국민들께 할 ‘보고’가 대강 짐작은 되면서도, 약간은 궁금하다. 대선은 화려한 이력서와 명성만으로 뛰어드는 떴다방이 아니다. 내 고장이 우승하기를 바라는 전국체전도 아니다. JP나 친박계나 반 총장이나 이 당연한 걸 모를 리 없건만, 하는 모양새들은 딴 판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폴리뉴스 Poli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