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지는 자기검열의 문제


플라톤의 국가제3권에는 검열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등의 시가(詩歌)에 대한 검열이 필요함을 말한다.

“우리는 호메로스에게 그리고 다른 시인들에게, 비록 우리가 이런 구절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유의 모든 구절을 줄을 그어 지워 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화를 내지 않도록 간청할 걸세. 이는 그것들이 시답지 못하다거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듣기에 즐겁지 못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한결 시적일수록 그만큼 더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간에 듣지 않도록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네.”

플라톤은국가에서 호메로스를 수없이 인용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를 사람들이 못 듣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관의 차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날로 영향력이 커진 호메로스였지만, 플라톤이 보기에 그의 시가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들은 음모와 질투, 전쟁을 일삼았고 결코 도덕적으로 훌륭한 정의의 구현자가 아니었다. 자기 시대를 극복하고 진정한 정의를 찾으려 했던 플라톤은 그리스 사람들이 호메로스의 시가를 듣는 것은 해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 못했던 것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시가에 대한 검열을 말했던 플라톤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부정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렇게 선행했던 세계관들이 부정되는 가운데 지성의 역사는 발전해왔다. 그러니 한 시대를 풍미하는 어떤 가치이든 무한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각과 가치는 그 시대를 통과하고 나면 다시 평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시대를 이끌었던 가치의 운명은 결국 역사 속에 내맡겨진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그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고 유한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정치적인 가치나 신념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구성원 저마다의 정치적 가치와 신념이 다른 사회에서, 서로 다른 주장과 의견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어느 한 입장의 편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그 편이 하는 일에 감히 시비를 건다고 해서 돌팔매를 던지고 맞을 일은 아니다. 모두가 같을 것을 기대해서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적폐의 시대였던 이명박근혜 시절, 우리는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을 불온시하는 그 검열은 항상적이었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검열 당하는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많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났다. 권력은 민주화 되었고 더 이상 비판을 검열하지 않으리라. 권력에 의한 검열은 이제 사라지리라 믿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자기검열이라는 말이 대신해서 들어선다. 권력을 대신해서 비판의 입을 막으려는 모습이 새로이 등장한다. 우리의 대통령을 지켜줘야 한다는 일념은 문재인 대통령 뿐 아니라, 그가 행한 인사와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금기로 만든다. 그 금기를 깨뜨린 언론이나 개인들은 곤욕을 치르게 된다. 여중생을 친구들과 ‘공유’했다는 무용담을 펼쳐놓았던 청와대 행정관을 비판하는 일 조차도 공격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가 모든 사안에 대해 어느 한 편을 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권리 중 하나로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꼽았다. 데리다는 “나를 ‘당신들 중 하나’로 간주하지 말라”며 아무런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를 말했다. 선(善)과 악(惡) 사이의 그 어디 쯤에 있을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편 가르기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토록 비난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진영은 결국 썩어가는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다. 비판이 필요없는 권력이란 세상에 없다.

하지만 끝없이 몰려오는 욕설과 저주 앞에서 위축되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의 소신과는 상관없이 조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할 경우도 많다. 시장에서 생존이라는 것을 해야 할 입장에서는, 무리지어 다니는 댓글폭탄 앞에서 자기보호 본능이 발동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지고 위축되며, 결국 눈치를 보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서로가 도드라지지 않으려 한다. 

권력으로부터의 검열에 대처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두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면 된다. 마음이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하지만 검열하는 권력은 없는데도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시대의 생존법은 무척 복잡하다. 그것이 외부의 눈치보기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자기 내면의 판단에 의한 것인가를 가리는 것이 스스로도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나 날선 긴장을 오래 유지하기는 쉽지 않기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문장법을 찾는데 점차 익숙해진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검열의 내면화는 일상화되고 만다.

다행히도 권력이 검열하는 시대는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검열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권력으로부터의 검열은 성문헌법이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검열로부터는 내 양심 속의 헌법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마갈리 로텔의 말이다.

“자기검열은 저자나 기자의 생각을 뿌리부터 뽑아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인 검열보다 더 나쁘다. 검열은 판결이든 법이든 유혈이든 흔적을 남기지만, 자기검열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는 처음부터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기검열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자기검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열이다.” (검열에 관한 검은 책』)

그것이 오직 자신의 양심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면, 검열에 ‘좋은 검열’과 ‘나쁜 검열’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게다. 스스로 점검하되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 새로운 시대의 작문법이 되어야 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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