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알바 등 비인간적 노동, 법으로라도 금지시켜야


백화점 주차장 입구 땡볕에서 앳된 청년이 차량 진입 안내를 하고 있다. 수신호와 함께 이 더위에 소리소리 질러가며. 에어컨 빵빵하게 틀었을 차량 안의 사람들은 행여 밖의 더운 공기 들어올까봐 차창 꼭꼭 닫아놓고 있어서 그 청년이 지르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진입하면 층마다 또 앳된 청년들이 서서 빈 주차 칸으로 유도하거나 “한 층 더 내려가시라”고 역시 쉰 목소리로 깍듯이 인사하고 안내한다. 푹푹 찌는 한증막 지하주차장에서 고농도 자동차배기가스 마셔가며 그렇게 일사병과 배기가스 매연에 직격으로 노출된 채 일한다. 

백화점주차장 알바, 노동력이 아니라 생명을 파는 것

다른 알바자리보다는 받는 돈이 약간 많아 알바 구직자들이 몰린다. 이런 알바는 노동력 제공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일부를 제공한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을 것이다. 

다중 이용시설 중 유독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같은 유통분야에만 이런 알바가 있다는 것은 재고와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용자 편익증대나 안전 확보가 유통업 분야에만 요구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고객을 뺏기지 않으려는 경쟁의 소산이란 점이 더 농후하다. 그 경쟁의 도구로 청춘 알바를 싼 값에 쓰는 것이다. 이런 야만적 ‘고객 서비스’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

비인간적 착취노동은 야만성의 증거

연 전에 어떤 갑질고객이 “친절하지 않다”며 알바생들을 주차장 바닥에 무릎 꿇리고 손찌검까지 한 일이 있었다. 이화여대 조 모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이 무릎 꿇었다”며 한탄했다. 갑질 고객의 폭력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처벌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심하기는 그 교수도 마찬가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니 생각의 지평이 단세포적인 그 교수의 저열한 인식체계에 공분을 느꼈다. 알바생들이 무뢰배 고객들과 패기 있게 멱살드잡이라도 했다면 어찌됐을까. 바로 잘리고, 백화점은 사과문 냈을 것이다. 알바생들의 패기 여부가 아니라 무뢰배 갑질고객을 꾸짖고, 비인간적 착취노동을 없애라고 일갈했어야 한다.

서비스라는 미명 하에 비인간적 노동을 시켜야 백화점은 운영될까. 이게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친절경영’일까. 방학 맞아 우루루 쏟아져 나온 알바생들에게 선심 쓰듯 푼돈 쥐어주며 차마 못할 짓을 시켜도 될 만큼 우리 사회는 아직 야만적인가. 어느 백화점이든 먼저 나서서, “고객들 주차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비인간적 주차알바는 폐지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마도 매출 그리 줄지 않을 것이다. 고령자나 노약자 등 주차조력 필요자는 대신 주차해주면 된다. 이미지 개선효과가 주차불평 고객들의 푸념보다 수백 배 크리라고 본다. 

기둥 없자 사람 사서 현수막 묶어놓는 알바도 자행

필자는 심지어 이런 제보도 받았다. 현수막 걸기 좋은 길목인데, 기둥이 하나 밖에 없어서 걸 수 없자 사람을 사서 현수막을 몸에 걸고 그냥 세워두는 알바, 말하자면 사람기둥인 것이다. 처참한 일이다. 이런 알바는 노동력과 화폐의 거래(또는 교환)가 아니다. 착취다. 고용이라는 이름하에 자행하는, 같은 인간임을 의문케 하는 반 공동체적 자본폭력이다. 배운 것 적거나 기술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몸으로 때워야 하는 하급노동이 아니라, 비인간적 학대행위에 가깝다. 고용-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인권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닐까. 

적폐청산, 거대담론서만 찾으려 말라

같이 살자. 
내가 하기 싫은 것이나 하지 못할 것, 돈의 힘으로 남에게 시키지 못하게 하자. 주차장 청춘들이나 할머니 파지리어카처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을 없애가는 것,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학대에 가까운 비인간적 노동은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 법으로 금지를 시켜서라도.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이자, 그렇게 원하는 ‘선진국’이다. 

최소한의 인간존엄성을 공유하면서 같이 사는 길을 제도화하는 것? 결국 정치다. 추경안이나 인사청문회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촛불대선 이후 정치권에 변화와 개혁에 대한 주문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눈을 돌리면 정치권이 할 일은 참으로 많다. 적폐청산을 거대담론에서만 찾으려 하지 말기 바란다.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 정치의 본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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