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 후 권력의지 강화 ‘저와 민주당’을 정치적 주어(主語)로 삼아

[폴리뉴스 정찬 기자]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입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18대 대선 패배 1년을 맞은 201312월에 낸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의 머리말에 쓴 글이다. 지난 대선 패배를 자신의 정치도전 종착지가 아닌 19대 대선 고지를 밟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각오다.

본격적 정치활동에 나서기 전인 20115, 문 전 대표가 낸 저서 <운명>은 국민의 호출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숙명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로부터 2년 반 후의 문 전 대표는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19대 대선 승리라는 정치적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승부사의 면모를 더했다.

그의 정치 입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숙명적이고 동지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문재인은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문재인의 운명 중)”고 했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운명으로 표현했다.

201312월의 문재인은 <끝이 시작이다>에서 저와 민주당은 부족한 점을 알게 됐다고 대선 패배를 복기한 후 지난 대선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법이다. 저와 민주당이 다시 희망과 믿음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그리도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이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의 수동적 굴레가 아닌 능동적 권력의지저와 민주당이란 주어(主語)’에 축약했다. ‘노무현의 동지임에도 정당 밖에서 살아왔고 심지어 냉소적이었던 문재인의 변화다. 지난 대선 때 당과 원만치 못한 관계를 노정했고 결국 시민캠프를 만들어야 했던 문재인은 2년 만에 민주당을 자신의 대권도전의 일심동체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나아가야할 길로 진보진영이 회피해온 안보와 경제성장부문에서 강한 민주당으로 거듭나면서 시민정당으로 나아가는 것이 “2017년의 승리를 바란다면 민주당이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외길이라고 했다. 이는 자신이 당권을 장악해 자신이 당 혁신을 이끌어보겠다는 선언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민주당(민주통합당)은 대선평가를 통해 친노 패권주의청산이 주된 화두였고 시민참여정당론은 폐기되고 당원주의로 회귀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안철수 의원 쪽의 새정치연합과의 통합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기에 전면에 나설 계제는 아니었다.

문 전 대표는 20152월에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당 대표직을 수행한 약 10개월 기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해 4월 재보선 패배를 시작으로 쏟아지는 퇴진 요구는 날이 갈수록 거셌다.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공천주도권을 두고 생사를 건 계파 갈등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강하게 만들어 자신의 대권도전의 발판을 삼겠다는 문 전 대표 집념은 당내 반대세력의 흔들기를 이겨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당되면서 문재인의 정치적 생명도 끝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야권 심장부인 호남의 () 문재인 정서로 민주당이 총선서 패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문재인의 도전은 여기까지로 여겨졌다.

반전은 총선에서 발생했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100석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지만 결과는 123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됐고 국민의당과 함께 여소야대의 국회를 만든 한 축이 됐다. 총선 승리로 문재인 퇴진론은 불식됐고 차기 대권 도전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이 승리가 문재인 전 대표를 운명에 의해 불려나온 존재에서 운명의 파도를 헤치는 승부사의 이미지를 더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회에서 탄핵된 후 문 전 대표는 야권 내에서 대세론을 형성했고 여야를 아우른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박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인용으로 끝날 경우 60일 이내에 치러질 조기 대선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선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20115월의 문재인, 201211월 안철수와의 단일화과정에서의 여러 실책을 두고 당시에는 저 자신도 그것이 초래할 손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1219 끝이 시작이다 중)”고 후회한 정치 초보생 문재인, 5년의 시간이 지난 2017년을 맞이한 지금의 문재인은 분명히 달라졌다.

5년 전의 문재인과 지금의 문재인이 가지는 정치적 위상과 무게는 완전히 달라졌다. 친노 패권주의의 그늘이 아닌 친문 패권주의의 중심이다. 5년 전 박근혜 대세론을 깰 대안이었지만 지금 그는 차기 대선 대세론의 중심이다. ‘문재인을 깨기 위한 도전자 내지 대안만들기는 여야를 넘은 공통된 주제다. 사방이 도전자로 에워싸여 있는 위치다.

5년 전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됐다...(중략)...피할 수 없는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1219 끝이 시작이다)”고 했지만 지금의 문재인은 운명을 수용하는 데 머물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로 커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017년 대선은 문재인을 빼고는 어떤 이야기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월남민의 장남 문재인, 시위전력으로 재적, 사시 합격

문 전 대표의 정치적 고향은 부산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에 월남해 경남 거제에 정착했고 문 전 대표는 한국전 와중인 1953124일 거제에서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부산에 정착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는 부산 남항 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어머니가 연탄배탈을 하며 대학 진학까지 한 탓에 부모님에 대한 부채의식 또한 컸지만 가난 속에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가난이 내게 준 더 큰 선물도 있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문재인의 운명 중)”

문 전 대표는 시국 인식이 동년배보다 빨랐다. 경남중학교 시절 <사상계>를 탐독했고 경남고등학교 시절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3선 개헌 반대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선포한 1972년에 경희대 법대에 진학한다. 여기서 그는 나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리영희 선생이라고 밝힌 사상의 은사인 고() 리영희 선생을 만났다.

대학에 진학한 문재인은 19754<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 당한 다음날 대규모 학내 시위를 이끌며 학내시위를 주도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다. 문 후보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구속과 제적, 강제징집 등을 겪게 된다. 이후 군에 입대해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군 생활 중 문 전 대표는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고 공중낙하·수중침투·천리행군 등도 해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8년 그는 육군 병장(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으로 만기 제대한다.

문 전 대표는 <운명>에서 군대생활 경험은 제대 후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 생전 처음 겪는 일들을 막상 해보니 해 낼 수 있다는 경험은 어떤 난관을 앞에 두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부딪혀 가야할 때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고 군 생활을 평가했다.

문재인은 군 생활을 무난히 마쳤지만 제대한 후 그의 삶은 막막했다. 시위 경력으로 복학의 길은 막혀있었고 취업도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백수(?)로 있었고 와중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이에 따른 죄의식을 지금도 갖고 있다. 문 전 대표는 고시 공부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뒤늦게나마 한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아들로서의 결심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로 가 고시공부에 몰입했고 이듬해인 1979년 사법시험 1차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2차 사법시험 합격을 목표로 공부하던 중 10·16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10.26이 발생했다. 그 여파로 긴급조치는 해제되면서 1980년 문 전 대표는 학교에 복학했다.

그는 복학생 대표로서 1980서울의 봄한가운데에서 활동하던 중인 4월에 사시 2차 시험을 쳤다. 그러나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구속됐고 다른 학생과 민주인사들과 함께 계엄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당시 5.15시위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받았고 혐의 없음을 확인한 경찰은 20여일 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고 계속 경찰서 유치장에 가둔다. 여기서 2차 사법시험에 합격 통지를 받았고 며칠 후 석방된다.

문 전 대표는 사법연수원 동기는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박정규 민정수석과 조배숙·박은수·고승덕 전의원 등이 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문 전 대표는 시위전력 때문에 자신이 원하던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부산으로 내려와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운명적인 노무현과의 만남 돌아보면 신의 섭리

여기엔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면 노모를 모실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이 앞섰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산행은 노무현 변호사와의 운명적 만남을 예정했다. 둘은 첫 만남에서부터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했고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주로 맡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82년부터 노 대통령과 함께 운영한 합동법률사무소는 울산, 창원 거제 등 인근 지역을 망라하는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가 됐고 자연스럽게 문 전 대표도 재야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노 대통령과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 모임을 창립하고 대표를 맡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 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의 대표도 역임했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를 창립하고 876월 민주항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부산 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19876월 항쟁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문 전 대표는 “6월 항쟁은 우리 민주화 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민주항쟁이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 하에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산 국본의 중심에 노무현 변호사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적어도 5공시기 동안 노무현 변호사만큼 치열하게 투쟁한 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문재인의 운명 중)”고 했다.

문재인과 노무현과의 만남은 운명의 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문재인에 대해 2002년 한 연설에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을 했고 문재인 또한 이러한 노무현과의 신뢰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이 자리로 이끌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 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문재인의 운명 중)”

198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13대 총선에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들어갔지만 문 전 대표는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서 문 전 대표에게도 부산에서 출마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문재인인 정치는 자신이 할 일은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노 전 대통령도 그의 뜻을 존중했다.

그래서인지 문 전 대표의 운명에서도 이 시절의 자신의 삶에 대한 기술은 대폭 생략했다. 다만 노 전 대통령에겐 가장 치열하게 정치적인 도전을 펼쳤던 시기였기에 문 전 대표는 비슷한 정치적 정서를 공유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시작과 끝의 산증인, 운명처럼 온 노무현 서거

문재인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자 부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때도 민주당 당원 가입은 하지 않았다. 돕는 것은 얼마든지 하겠지만 정치에는 끌어들이지 말라는 노 전 대통령을 향한 무언의 요구였다. 그러나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당선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운명처럼 강요했다.

문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초대 민정수석을 맡으면서 향후 노무현 정부의 공과와 함께 책임과 과제까지 떠안는 길로 갔다. 당시 그는 민정수석을 맡아달라는 노 전 대통에게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랬던 그는 민정수석을 두 번에 걸쳐 맡았고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그는 참여정부 청와대의 시작과 끝이었고 산 증인이 된 것이다.

민정수석 수석 재직시절에 대해 문 전 대표는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들이었으나 나는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말했다. 인사검증을 담당해야 하는 민정수석으로 그는 조각(組閣)에서부터 정부 초기의 여러 가지 현안들에 대해 깊숙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고유 업무 외에도 노동사건 등을 담당하면서 늘 격무에 시달리며 잠시 쉴 수도 없었다. 2003년 민정수석 재직시 과로로 인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치아를 10여개나 뺐다. 이에 건강을 이유로 1년 남짓 만에 물러나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나는 등 재충전의 시간을 갖으려 했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 법률대리인단을 이끄는 중책을 맡아야 했다.

이후 그는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등을 거친 뒤 20073,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다시 복귀해 참여정부 청와대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비서실장 취임사에서 흔히 임기 후반부를 하산에 비유한다.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 참여정부는 하산이 없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다며 노무현 정권 말기를 임했다.

대부분의 정권에서는 정권 5년차에 국정과제가 많지 않았지만 문 전 대표는 그해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2007년 문 전 대표는 정치적이지도 않았고 권력의 향배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자신도 국가의 부름에 따른 공직생활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만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2008년이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에 놀란 이명박 정부는 그 배후에 친노무현 세력이 있다고 보고 시시각각으로 노 전 대통령을 주변을 조였다. 노 전 대통령 후원회장이었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검찰수사는 전형적인 표적사정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검찰권력을 동원해 정치보복의 칼날을 들이댔지만 노 전 대통령 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결과가 20095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 상주를 맡은 문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이 유언에서 운명이다고 한 말의 무게를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수용하며 대선출마, 그리고 패배

노무현 서거 이후 문 전 대표는 국민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추모하는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 서거 1년 후인 20106.2지방선거에서 친노세력을 대거 정치전면으로 소환했기 때문에 노무현의 동지인 문 전 대표의 거취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노무현재단 설립 후 이사장을 맡은 문 전 대표는 친노세력의 대표로 인식됐다. 특히 유시민 대표가 이끄는 국민참여당 후보가 20114월 김해을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친노세력의 중심으로 급속히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야당 분열로 인한 지지층의 분열양상은 심각했고 그 후유증 또한 컸다. 이 무렵 문 전 대표은 자신의 운명을 수용했고 정치전면에 나서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해 5<운명>이란 저사를 통해 정치권에 입문 신고식을 가졌고 곧바로 혁신과통합을 출범시켜 야권통합 운동에 나섰고 201110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출마하도록 권유하며 정치적 보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시민후보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자 그 여세를 몰아 손학규 민주당 대표과 함께 야권통합을 이뤄냈다.

급하게 불려나오듯이 정치에 입문한 탓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선패배 때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정치현실을 몸소 체험했다. 그에게 4.11총선은 아쉬움 투성이였다. 당시 민주당은 127석으로 약진했지만 새누리당에 완패했고 그 또한 PK(부산경남) 낙동강 벨트를 책임졌지만 PK에서 자신을 포함해 3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 결과 친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한명숙 지도부가 사퇴까지 했다.

그에게도 부산지역 단수공천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는 “(당 지도부의 결정을 두고 저를 비난하는데) 저로서는 기가 막히고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은 정치를 좀 더 겪어본 후였다. 정치영역에도 크고 작은 지역적 관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속된 말로 나와바리..(중략)...지난 총선 대 부산지역의 공천에 관해 제가 감수해야 했던 비난도 그런 나와바리사고가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1219 끝이 시작이다)”고 했다. 정치판 생리에 대해 자신이 제대로 몰랐다는 얘기다.

총선이 끝나자 문 전 대표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문 후보는 전국 경선에서 13연승을 거두며 결선투표 없이 본선에 직행했다. 그러나 문재인 당시 당내 경선을 두고 한마디로 지나치게 소모적이었다고 술회했다.

경선 시작과 함께 시작한 룰에 관한 시비는 후보들 간의 비전이나 정책 경쟁마저 잠재워버렸다...(중략)...우리끼리 던진 공격의 언어가 더 처참하고 아팠다. 그런 언어는 본선에서 새누리당 측의 공격소재로 고스란히 재활용 됐다...(중략) 연승을 거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건대 경선마다 고통이었다...(중략) 이래저래 잃은 게 많고 상처가 큰 경선이었다(1219 끝이 시작이다)..”고 했다.

당내 경선은 어쨌든 돌파했지만 본선 전에 안철수 당시 무소속 후보와의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도 그에겐 아쉬움이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단일화가 제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만 사실은 그늘도 컸다“(모든 것을 후보들의 합의에 맡기는 방식으로는) 아름다운 단일화를 해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단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한완상 담쟁이 포럼 이사장이 제게 통 큰 양보를 당부했다...(이에) ‘제가 모두 양보해서라도 단일화협상을 타결시킬 테니 염려 마시라고 했다...(그런데) 시간을 끌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난 대선에서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민주당의 후보였기에 민주당이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여론조사 방법을 민주당의 반발을 무시하고 수용할 수 없기에 막판에 대승적 양보를 할 생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과욕이 됐다고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대선 본선에 나서 득표율 48%1470만표를 획득했으나 108만표 차이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문 전 대표는 패배의 직접적 요인에 대해 자신을 지지하는 2030세대가 결집했음에도 박 후보를 지지하는 5060세대가 더 무섭게 결집한데 있다고 분석했다.

대선 패배 후 문 전 대표는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들에게 평생 떠안게 된 빚(1219 끝이 시작이다)”을 지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빚 갚을 방도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국민들로부터 받은 그 많은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어떻게 국민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돌려 드릴 수 있을는지.”라며 19대 대선을 향한 새로운 시작도 알렸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프로필

1953 경남 거제 출생

1965 부산 남항초등학교 졸업

1968 경남중학교 졸업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1972 경희대학교 법대 입학

1975 학생운동으로 투옥, 서대문 구치소 수감

1978 육군 병장(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 제대

1980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 22회 사법고시 합격

1981 김정숙 씨와 결혼 (슬하에 11)

1982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인권변호사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 경남 변호사 모임 대표

부산 NCC 인권위원, 불교 인권위원,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 YMCA 이사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1985)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1987)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 부산시 교육청 행정심판위원

부산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1995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2005 청와대 민정수석

2004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 청와대 비서실장

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9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2010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1 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

2012 19대 국회의원 당선(부산 사상)

2012 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2015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2016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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