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 몽양 여운형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폴리뉴스 이지혜 인턴기자]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 비폭력 만세운동이었다. 남녀노소 민중들이 만세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히고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해 그 배경과 진행,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참석 시도 

1917년, 러시아의 레닌은 민족해방운동에 나선 약소국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역시 1918년 미국 의회에서 14개조의 평화원칙을 선언했다. 윌슨은 여기서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했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약소민족들은 두 민족자결주의에 큰 희망을 품었다. 무단통치에 허덕이던 한민족도 마찬가지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 미국은 특사 크레인을 중국에 파견했다. 크레인은 환영회에서 “중국도 그간 일본에게 받은 손해를 청구할 수 있다”고 발언하며 중국 대표를 파리강화회의로 끌어내고자 했다.

크레인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설명하며 파리강화회의가 “피압박민족에 대해서는 해방을 강조한 것이므로 약소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라고 했다. 당시 상하이에서 있던 여운형이 이 연설을 들었다.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크레인을 만났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 하겠는데 당신의 원조를 요청하는 바이다” 여운형의 말을 들은 크레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받기는 어렵겠지만,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을 것이라 답했다.

여운형은 장덕수와 함께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했다. 이것을 크레인에게 전달하고, 같은 문서 두통을 파리로 가는 상하이 <밀라드 리뷰> 잡지 사장 토마스 밀라드에게 부탁했다. 

여운형은 진정서에서 일본의 제국주의가 미국도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고 독립의 의지를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이 사건은 신한청년당 발전 계기가 됐다. 사실 그 기초는 이전부터 존재했다. 1918년 여름부터 여운형은 조동호·장덕수·신석우·김철·선우혁과 매 토요일마다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에 보낼 청원서를 작성하면서 여운형은 창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개인자격으로는 청원서를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약 30여명의 청년을 모아 ‘신한청년당’을 만들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했다. 김규식이 미국 버지니아 로노크대학 영문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텐진에 있던 김규식은 상하이로 와 입당하고 1월 말 파리를 향해 떠났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의 활동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자금을 모았다. 또한, 국내외에 독립운동을 촉구하고자 했다.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는 국내로, 장덕수와 이광수는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신한청년당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다. 연해주의 윤해, 고창일은 파리로 출발했으나 회의가 끝난 후에야 파리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했으나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지 않아 좌절됐다. 이승만은 스승이었던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했지만 거절당했다.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2.8 독립선언’

2.8 독립선언문 원본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 2.8 독립선언문 원본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1918년 12월 15일,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청원서를 미국에 제출했다는 보도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실렸다. 이는 일본의 한국유학생들을 자극했다.

도쿄조선유학생 학우회는 1918년 12월 29일 메이지회관의 송년회, 30일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의 동서통합웅변대회, 그리고 이듬해 1월 6일의 웅변대회를 통해 구체적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최팔용·전영택·서춘·김도연·백관수·윤창석·이종근·송계백·김상덕·최근우 10명의 임시실행위원을 선정했다. 이 중 전영택이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광수, 김철수가 투입되어 조선청년독립단이 조직됐다.

이광수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일본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했다. 송계백은 본국으로 가 한글활자와 인쇄기, 운동자금을 구하고 본국에도 소식을 알리기로 했다. 그는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독립선언서, 결의문, 청원서를 일본 각지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과 조선총독부, 귀족원 등에 보낸다.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약 600명이 모였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했다. 유학생 학우회 선거를 명목으로 했던 모임은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꿨다. 백관수가 독립선언문,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에서 한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역사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국권탈취의 불법성과 침략정책을 고발하였으며,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동양 평화에 관해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이유가 없으며 일본이 한국에 대해 식민 통치를 계속한다면 혈전도 불사할 것이라고 썼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이 세계평화와 인류 문화에 공헌할 것임을 선언했다. 

오후 3시 50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미리 상하이로 빠져나간 이광수를 제외한 대표 10명을 포함은 27명이 끌려갔다.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영문으로 된 2.8독립선언서를 윌슨대통령과 로이드 조지 등에게 보내고, 2월 8일을 기다려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와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기사화 하려 했다. 이 기사는 이튿날 <데일리 뉴스> 평론란에 실렸고, 10일 <차이나 프레스>에 상세히 보도됐다.

이후 12일 히비야 공원에서,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에 관한 모임을 하다 해산됐다. 23일에는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다 인쇄물이 사전 발각되어 4명이 구금됐다. 그러나 오후 2시경 150명의 유학생이 모였고, 구금되지 않은 최재우가 나타나 유인물을 배포하며 다시 시위를 시도했으나 곧 해산되고 최재우도 체포됐다.


고종의 죽음, 독살?

1919년 1월 22일,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표됐다. 이는 여러 가지 추측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 중 백성들을 가장 흔들어 놓은 소문은 ‘독살설’이었다. 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은 백성들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했다. 

국장일은 3월 3일로 결정됐다.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수만 명이 서울로 운집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사진=연합뉴스 제공>
▲ 민족대표 33인 <사진=연합뉴스 제공>

 

1919년, 최린·권동진·오세창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청했고, 손병희가 허락했다. 손병희는 대중화·일원화·비폭력 세 가지를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최린은 2월 초 최남선·송진우·현상윤 등과 여러 번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토론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민족대표를 내세울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염두에 두고 있던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이 모두 참여를 거부했다. 최린은 결국 자신들이 대표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승훈은 상하이에서 선우혁을 만난 이후,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린은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을 함께할 것을 요청했다. 이승훈은 2월 12일 평북 선천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천도교 측의 제안을 설명하고, 참여를 결정했다. 

17일, 이승훈은 박희도를 만났다. 당시 박희도를 포함한 기독교측은 천도교와 함께하지 않고,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려 하고 있었다. 이승훈이 최남선과 최린을 만나 기독교의 독자 계획을 전달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이 꼭 통합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측은 천도교가 폭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이를 검증하려 했다. 최린은 그런 사실이 없음을 해명하고, 함태영·이승훈과 비폭력 투쟁에 합의했다. 또한 최린은 기독교가 하려는 독립청원에 대해 반대하고 3.1운동의 방향을 ‘독립선언’으로 결정했다. 

2월 24일, 양측은 독립운동의 추진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를 결정했다. 거사일은 3월 1일로 결정했다. 황제의 장례식에 거사를 하는 것은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과, 2일은 안식일이라는 기독교 측의 주장 때문이었다. 

기독교 측과 합의를 끝낸 최린은 불교 측 한용운을 방문하여 참여를 권유했다. 시일이 촉박하고 일제의 감시가 심했기에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만 참여하게 됐다. 유림과도 접촉했으나 역시 시간문제와 감시 탓에 성사되지 못했다. 

이로써 종교계 대표들을 내세운 민족운동연대가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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