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미화된 고구려 멸망의 공신 '설인귀'

'김유신의 집에 간 적도 없는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종?', '50세가 되어서야 혼담이 오간 노처녀 문희와 보희', '지나치게 미화된 고구려 멸망의 공신 설인귀'

퓨전사극 '주몽'과는 달리 웅대한 고구려사를 사실적으로 복원하겠다는 의도로 출발한 정통사극'연개소문'. 그러나 '연개소문'에도 맹점은 있다.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고구려 드라마 '연개소문'을 분석한 자신의 논문에서 "수양제를 1부의 주인공으로 삼는 탓에 다른 인물들의 출생연대가 대폭 올라가게 됐고 이 때문에 인물과의 관계는 물론 역사관계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을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간이다. 김용만 소장은 "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건과 어떠한 관련을 맺으냐에 따라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이 구분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드라마 '연개소문'은 인물들의 갈등관계를 흥미진진하게 표현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출생연도를 수정, 특히 주인공 연개소문의 출생연도를 20년이나 앞당겼다.

우선 김용만 소장의 논문에 기초해 연개소문의 실제 나이를 추적해보자. 드라마는 연개소문의 탄생시점을 590년으로 잡고 있지만 김 소장은 연개소문의 실제 출생연도가 610년~619년 경이라고 주장했다.

연개소문이 15세에서 20대 초반에 첫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탄생시점은 첫째아들 연남생이 태어난 634년에서 15~20의 중간수인 17을 뺀 617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15세이상이면 노역에 징발될 정도로 성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11대 동천왕이 중천왕을 낳은 것도 15세때의 일이다.

만약 드라마 설정처럼 연개소문이 590년에 태어났다면 그는 첫아들 남생을 만 44세에 낳은게 된다. 당시 고구려인들의 평균수명은 55세였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넘는 오늘로 따지면 70세의 노인이 첫 아들을 얻은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연개소문의 출생연도를 무리하게 올려 드라마를 구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용만 소장은 "작가가 연개소문 못지 않게 극적인 삶을 살았던 수양제를 조명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서기 569년에 태어나 604년 수나라 2대 황제가 되고 618년에 죽은 인물인 수양제 양광을 1부 주인공으로 삼는 탓에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출생연도가 대폭 올라가게 됐다"고 지적했다.

연개소문의 사망연도도 왜곡됐다. 드라마는 연개소문을 김유신 못지 않은 장수를 누린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연개소문은 665년경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신은 673년까지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수양제로 인해 연개소문의 출생연도가 올라가다 보니 주변인물들의 나이도 뒤죽박죽됐다.

"50세에 혼담이 오간 문희와 보희"

602년~604년까지 연개소문과 사랑을 나눴던 문희와 그의 동생 보희. 그러나 실제 김유신이 595년에 태어났고 보희의 결혼상대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602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보희 역시 602년경 태어나지 않았거나 5세미만의 어린 아이일수밖에 없다.

문제는 문희와 보희가 단지 일찍 등장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김용만 소장은 "이들이 72회에서야 비로서 김춘추와 만나 결혼문제를 논의하는데 이때는 연개소문이 권력을 잡은 시점, 즉 642년으로 무려 50세가 되어서야 혼담이 오가는 노처녀가 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연개소문의 대척점에 선 인물인 연태수와 사비류, 협부, 설유 등 5부 욕살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 창조된 인물로 드라마에서 너무 일찍 등장하고도 죽지 않고 버티는 인물들이다.

우선 연태수는 드라마에서 591년에 30~40대의 원숙한 정치가로 나오는데 642년이 되어야 죽는다. 무려 80~90세에 이르는 장수를 한 것이다. 사비류와 협부, 설유 또한 80~100세에 이르는 장수를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건 그렇다 치고 드라마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5부 욕살이 변하지 않고 무려 50년이나 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김용만 소장은 "5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물, 변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는 것은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굶주린 것은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

다시 드라마 1,2부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 '연개소문'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첫 회를 안시성에서의 화려한 전투로 시작했다. 드라마는 안시성 전투와 관련, 안시성은 당군에게 포위됐고 식량부족에 시달렸으며 구원병조차 오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오히려 안시성 전투에서 굶주렸던 쪽은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군이었다.

고구려-당나라간 3대 전투는 주필산, 신성, 건안성에서 일어났다. 당시 고구려 대군은 신성에서 당나라 육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건안성에서 당나라 해상 보급로를 막았으며 주필산 전투에서는 당군의 육상 진격을 막고 있었다.

때문에 당나라군은 요동성과 안시성 사이인 주필산에서 장기간 머물러야 했고 차츰 식량이 떨어져 결국 철군하게 된다. 당군이 퇴각을 명령한 645년 9월 18일, 요동성에는 겨우 10만석의 잔여군량이 보관돼있었을 뿐이었다.

김유신 집에 간적도 없는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종?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종이었다는 설정도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드라마 '연개소문'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소개한 '갓쉰동전'을 인용했지만 '갓쉰동전'에는 갓쉰동이가 이세민의 집에 간 사실은 적혀있으나 김유신의 집에 갔다는 언급은 없다.

김유신의 집에 간 적도 없는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종이라는 설정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유신과 연개소문은 일생에 단 두번 간접적인 인연을 맺는다.

645년 10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던 김춘추가 억류되자 김유신이 군대를 끌고 고구려에 석방시위를 한 사건, 622년 1월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연개소문이 머물던 평양성 주위에서 굶주림에 떨자 김유신이 이들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고구려 국경을 넘은 사건 뿐이라고 김 소장은 소개했다. 연개소문과 김유신이 직접 대면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막리지는 고구려 최고관직이 아니었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고구려 말기 최고 수상으로 묘사된 '막리지'도 고구려 최고 관직이 아니었다.

김용만 소장은 "막리지가 고구려 관등 체계에서 2위인 태대형과 동일한 실체이며 1위는 대대로"라고 밝히고 바로 이 대대로가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가장 큰 권한을 누렸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막리지'를 고구려 최고관직으로 묘사한 것은 연씨 가문이 역대로 막리지를 연임했다는 내용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막리지도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자라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2품, 즉 2위에 불과했다"며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서 연개소문은 막리지에서 '대대로'로, 또 '태대대로'로 직급을 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설인귀, 연개소문과 1대 1대결 불가능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고구려 멸망에 앞장섰던 인물 '설인귀'를 너무 과장해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선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안시성 전투에서 연개소문에 대항해 1대 1대결을 벌였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당시 설인귀는 무명의 소졸로 연개소문과 1대 1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으며 연개소문이 설인귀의 이름을 직접 불러준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인귀는 평민출신에서 당나라 장수가 된 인물로 당태종 이세민을 구해 중국 소설에서 충신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중국에는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와 같은 설인귀 영웅담도 존재한다. 설인귀 영웅담은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 소장은 "이를 사실 그대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하고 "중국은 설인귀에 관한 소설을 빌미로 지금도 고구려 영토 곳곳에 설인귀가 땅을 개척하고 성을 점령한 것처럼 묘사하였으나 설인귀가 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활동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밝혔다.

요즘에는 한국에서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과 같은 고구려.발해 역사 드라마 붐이 일고 있는데 맞대응이라도 하듯 중국에선 '설인귀전기'라는 무협드라마 붐이 한창이다. 현재도 요동 일대 몇몇 유적지에는 설인귀의 동상을 세워놓고 기념해놓은 곳이 있지만 실제 역사와 관련없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만약 중국의 설인귀전에 묘사된데로 이 설인귀 동상이 옛 고구려 영토 곳곳에 세워진다면?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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