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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⑤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특별기고]"경부선 철도 개통식을 구경하러 가다"

자고 나면 세상이 변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있다. 남녀가 7살이 되면 같은 밥상에 앉지 않는다. 7살이 되면 남녀의 성적 차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는 또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구분되며 사물이나 사회에 대한 의식적 시선을 두는 시기이다.

정공단 거리에는 또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골목길에서 놀이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귀가 있으니 들리는 이야기를 주워 담고 생각하는 아이가 되었다. 박재혁도 예외가 아니다. 정공단의 아이들은 점점 세상을 알기 시작했다.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하루가 자고 나면 달라졌다.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에서 일본은 ‘조선국은 자주국이다.’라고 인정한다. 실상은 청국 세력을 배제하는 술책이었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 경제적 활동을 시작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청나라가 패배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중화주의자들은 놀랐다. 개화 선각자들은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의 나라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일어나고 민비가 일본 깡패들에게 살해되었다. 일본은 조선 땅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었다. 의병들이 항쟁하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갔다(아관파천).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자주독립국인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조선은 사라졌다.

1900년 반침략⋅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투쟁을 전개한 활빈당은 관가를 습격하고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박영효의 지시를 받은 활빈당도 부산, 양산, 언양, 경주 일대에 나타났다. 러일전쟁까지 신문 지면에 실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개화 지식인들은 의병이 명분도 없고 인민에게 폐해만 입히고 결국 외국 군대를 불러들일 것이라 우려하였다. 1901년 9월 21일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기공식을 하였다. 1902년 7월 9일 북빈 매축공사를 착공하였다. 한국은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통해 군사기지 사용권을 얻었고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경부선 철도는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였다. 한국인들은 비로소 일본의 힘을 알게 되었고 급속히 친일 세력이 증대하였다. 황실은 밀정의 소굴이었다. 일본의 피해도 혹독했다. 108만여 명의 병사 중에 4만6천여 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약 16만 명이었다. 1905년 9월 5일 일본은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받았고,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제3국의 침략을 받으면 미국은 즉각 개입한다.”라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일방적으로 깨트린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당시 한국은 미국에 외교적 읍소를 하는 등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1905년 남대문역을 출발하는 경부선 최초의 기차, 이 문명의 이기는 한국 민중의 피와 땀을 빼앗는 수탈의 도구가 되었다. - 출처 : 大阪每日新聞 朝鮮版(1940.8.31.)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를 몰아내고 한국 침략의 정지작업을 끝내고,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시켰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일본 자신들의 손아귀 아래에 한국을 두게 되었다. 한국 침략의 교두보 부산에서 1905년 12월 약 41,374평의 북빈 매축 1차 공사를 완료하였다.

 

두모포 왜관을 지나 신초량을 가다

 

정공단의 아이들이 10살쯤 되는 1905년 전후는 한국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 정공단의 아이들은 부산진교회에 있는 서양인을 보았다. 가끔 일본인들이 마을에 와서 집을 사는 것을 보았다. 점점 마을의 집들이 일본인 소유로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경부철도 개통식을 보러 갔다. 박재혁, 최천택, 김영주, 김인태도 있었을 것이다.

좌천동에서 수정동을 거쳐 초량으로 갔다. 네 명의 아이들은 기차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갔다. 길은 바닷가를 끼고 있었다. 좌천동을 벗어나니 초가집들이 줄어들었다. 바다에는 무심히 갈매기들이 노닐었지만 멀리서는 큰 배들이 한두 척 보였다.

아이들이 먼저 만난 마을은 고관마을이었다. 1607년 설치된 두모포왜관(현 수정동 시장 일대)마을이었다. 규모는 동서 126보, 남부 64보로 약 1만 평에 달했고 500여 명이 거주했다. 왜관이 있었던 자리는 예외 없이 그 후 시장이 되었다. 이는 왜관 인근이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거래장소였기 때문이다. 두모포 왜관은 체류자의 증가와 임시 가옥이 많아져 더는 수용이 불가능해서 지금의 용두산 근처로 1678년 옮겼다. 그 이후 두모포 왜관을 고관(구관)이라 불렀고 신관을 초량왜관이라 했다.

왜관(倭館)은 일본인에게 거주와 통상행위를 허락한 일정한 지역과 그 건물을 말한다. 일본이 지은 곳이 아니라 조선 땅에 조선 돈으로 만들어서 제공한 것이다. 초량왜관에는 일본인 남자만 살았다. 일본인들은 왜관 밖을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었다.

초량 객사 근처에 조선인 초량마을이 있었다. 마을은 불법 통행(난출), 정보 유출, 밀수, 매매춘(교간) 등의 온상이었다. 특히 조선인 여인과 일본인 남성과의 매매춘이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인을 쫓아내고 동래부사 권이진은 담장을 만들고 1709년 설문(設門)을 세웠다. 조선 군인이 지키고 통제하였다. 허가받아야 출입할 수 있었다.

흙담에서 돌담으로 도둑이 들고 사고가 나서 돌담 위에 가시덤불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불법 밀수꾼들과 불만 있는 일본인은 불태워 없애기도 했다. 설문 밖으로 쫓겨난 조선인이 사는 마을이 신초량이 되었다. 사랑은 설문을 넘나들었고 일본인을 닮은 아이들이 초량마을에 살았다. 지금의 부산역 앞쪽 중국인 거리가 신초량마을이었다. 초량은 새터(새띠)마을로 ‘억새가 많이 자라는 푸른 풀밭’이 있는 동네였다. 모래톱을 끼고 있는 한적한 바닷가의 양달마을이었다.

신초량마을에 훗날 영주동과 초량동에 걸쳐 청국영사관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마을인 청관(淸官)마을이 들어섰다. 지금의 부산역 앞 초량바다와 접해있던 마을이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흰 모래가 펼쳐진 백사 청송의 바닷가였다. 1884년 청국 이사부가 개편되고 영사관이 개설되고 중국 거류민도 늘어났지만 1909년 중국인은 338명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청관 내의 토지와 가옥까지 일본 영사는 자기들 소유라고 고집할 정도로 세력은 미약했다. 1913년 청국 조계는 사라졌지만 부산 속의 중국으로 계속 남았다.

아이들이 볼 때 중국인은 한국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갓 대신에 모자를 쓰고 윗머리는 자르고 뒷머리를 땋아서 길렀고 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만 옷 색깔이 다양했다. 중국인 마을을 지나면서 아이들은 왜 우리 땅에 남의 나라 사람들이 마치 자기 나라 땅처럼 사는 게 이상했다.
영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왜, 우리 땅인데 청나라 사람들이 마치 자기 땅처럼 살고 있지?”
“야, 그것도 모르냐!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가?”천택이 말하자 잠자코 있던 인태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까. 힘을 가지려면 배워야 한다고 하잖아.”
재혁은 “배우면, 진짜 힘이 생길까?” 생각했다.

 

경부선 개통식을 보다

일본의 한반도 철도 부설 꿈은 오래되었다. 1885년 송전행장(松田行藏)이 4년간에 걸쳐 노선을 구상하고 답사하였고, 전도밀(前島密)은 일본철도와 연계하여 만주를 거쳐 중국은 물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철도망을 예상하여 한반도 종관(縱貫)철도를 일본 자본에 의해 부설하는 것이 급무란 것을 역설하였다. 일본은 철도노선 답사를 1892년부터 5차례를 실시할 정도로 철저했다. 총 294마일 10개 역으로 확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초량은 영선산으로 인해 부산과 동래의 경계가 된 지역이었다. 경부선 철도 남부 기공식을 초량에서 1901년 9월 22일 하였고 공사는 초량-구포 간이었다. 태극기와 일장기를 교차 세우고 아치형 입구를 만들었다. 완순군(完順君)과 궁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과 제2대 철도원 총재 심상훈(沈相薰)이 참석하였다. 1902년 8월은 구포-밀양선 공사를 하였다.

 

경부철도 정거장 건설을 위해 초량 5만여 평, 부산진 3만여 평의 토지가 강제 수용되었다. 초량의 600여 호의 한인가옥이 철거되었다. 일본은 철도를 놓겠다며 민간인의 땅을 빼앗고 가옥을 파괴하고 공사 현장에 한국인을 강제 동원했다. 침목용 목재를 강제로 남벌하여 산을 황폐화했다. 러일전쟁이 임박해지자 일본군부는 군사상 필요로 공사를 서둘렀다. 그만큼 부실 공사였다. 공사를 방해하다 공개 처형을 당한 한국인도 있었다. 항의하며 군수 부자와 일본인을 피살하기도 했다. 일본 자본가들은 철도 건설을 위해 국민주 형식으로 애국공채식 주식을 모집했다. 공사 건설비는 1마일(약 1.6km)당 세계 평균의 65% 수준이었으니 일본이 조선에 부설한 철도에는 한국인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었다. 철도에 울분의 돌을 던지기도 했다.

1905년 11월 22일 안양 육교에서 을사늑약에 분노한 원태우(元泰祐)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에 돌을 던졌다. 원태우가 던진 돌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창문을 깨고 정확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머리에 명중되었으며 이때 깨진 유리 파편 중 8조각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박혔다. 전치 1주의 상해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키는 등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신속하게 응급치료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경부철도 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가 경인철도 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를 매수하여 경부선(京釜線)과 경인선(京仁線) 두 선로를 아울러 소유한 이후로 서울과 부산간 선로공사가 빨리 완공되어 1905년 1월 1일부터 개업을 하였다. 1905년 5월 초량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는 구경꾼들이 모였다. 경부선 종착역은 원래 부산진이었지만, 일본 측은 한국 측 몰래 초량으로 변경했다. 부산 초량에서 한성 서대문까지 444.5km를 열일곱 시간 만에 갈 수 있게 됐다. 밤에는 안전 문제로 달리지 않아 실제로는 서른 시간이 걸렸다. 직행열차는 5월 1일부터 13시간에 275리를 달렸다. 매일 서대문발 남행열차는 4번, 초량발 북행 열차는 3번 있을 예정이다. 객차에 신식주방을 설비하여 여행객의 음식 물품도 판매하였다. 기차비는 3등 부산-경성 간은 4원 15전이고, 2등 칸은 3등의 두 배였다.

열강에게 철도는 산업화의 추동력이지만 식민지 지역에서는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다. 일본의 물류는 서울에까지 이르고, 조선의 물류는 부산항으로 몰려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는 통합되었다. 경부선이 개통된 지 몇 달 후인 9월 11일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운행되었다, 해양과 대륙이 연결되었고, 일본은 대륙 진출의 길을 열었다.

생활의 편리 이면에는 대륙 진출과 조선 수탈의 간계가 숨어있었다. 철도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의 상징물이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한반도 철도 건설을 대륙 침략의 병참선 확보라는 정치⋅군사적 고려에 기초하여 추진했다. 한반도 철도는 일본 본국에서 식민지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침략의 통로로, 아시아주의에 기초한 국가전략을 실현하는 도구로 건설되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 철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역내 철도’로서의 기능보다는 일본-조선-만주를 연결하는 ‘대륙 철도’로서의 기능을 훨씬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둘러보고 귀국한 김기수는 철도는 “차(車)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에 화륜(火輪)이 한번 구르면 여러 차(車)의 바퀴가 따라서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처럼 비처럼 날뛰었다.”라고 하였다. 쇠로 만든 괴물이 조상들께서 잠들어계시는 선산 앞과 옆으로 꽥꽥 소리를 다니는 꼴을 양반 유생들은 볼 수 없었다. 또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땅의 맥을 끊는다고, 조상의 무덤을 파손한다는 등등의 이유로 철도 건설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흥아 일본의 새벽녘에/ 대륙을 향해서 쏜살같이/ 희망 싣고 질주하는/ 광채도 찬연한 경부선”(「朝鮮 鐵道 唱歌(1910)」)이었다.


세계 일주를 꿈꾸다

아이들은 기차의 기적소리에 놀랐다. 번갯불을 먹으면서 쇳길을 달리는 검은 괴물이었다. 근대 문물의 상징인 기차는 낯섦과 동시에 경이감을 주었다. 철도가 지나는 곳마다 도시가 생겼다. 관광이란 단어가 등장했지만, 아직 평범한 한국인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다. 불구경하듯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았다. 그 불은 일제 침략의 출발 신호탄이었다. 많은 사람 중에 또래 아이가 한 명 보였다.
“니는 누꼬, 어디서 왔노?”
“나, 오재영이라고 해. 주례에서 왔다. 너거는?”
“우린, 좌천동에서 왔다. 와, 먼데서 왔네. 반갑다. 난 박재혁이라고 해!”


정공단의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조금 부티가 나고 덩치가 있어 보이는 오재영과 서로 인사를 했다. 한약상 아들인 오재영(오택)은 7살 때인 1903년 정월에 주례리 한문서당 삼괴제(三槐齊)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습자는 매일 용호(龍虎) 두 자를 크게 쓰는 공부를 매일 하였다. 그해 초여름에 동래 백일장에서 용호(龍虎) 습자(習字, 글씨쓰기)로 관상(官賞)을 받았다. 5년 동안 그는 계속 상을 받았으니 서예에 일가견을 가졌다. 그는 6살 때 조부로부터 동양 지도와 괘종시계의 설명을 듣고 시간 계산을 배웠던 근대적인 아이였다. 8살 때 『동몽선습(童蒙先習)』과 『천고담(天高談)』을 배웠던 아이가 철도 개통식에 구경을 온 것이다.

서울의 개통식은 1905년 5월 25일 남대문 정거장에서 거행하였다. 경부철도주식회사 총재 후루이치 고이[古市公威]가 참석하고, 한국 정부에서는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과 박제순 등 각부 대신이 참석하고 일본에서는 복견궁(伏見宮) 히즈야스와이[博恭王]과 오우라 가네다케[大浦兼武) 체신 대신, 하세가와[長谷川] 육군 대신, 그리고 각국 공사와 관람객 등 천여 명에 이르렀다. 고종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관련하여 일본인 관련자들을 표창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러일전쟁의 가장 큰 장면인 대한해협에서 해전이 일어났다.

경부철도는 국토의 공간거리를 시간적으로 크게 단축하게 했다. 부산사람들은 이제 경성과 중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관부연락선은 일본과 다른 국가로의 길을 또한 열어주었다. 철도와 여객선은 이제 사람들에게 시간을 각인시켰다.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한다. 근대적 시간이 한국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11월 20일부터 철도용 시각은 한국시간은 이제 30분 늦어진 일본 동경시간에 맞추게 되었다. 실상 자본주의는 시간의 장악이다. 시간은 돈이었다. 서울 개통식에서 미국 공사 엘렌은 의미심장한 축사를 하였다.
“한국에는 여러 계급과 당파가 있습니다만 철도는 평등자이므로 상민도 양반도 귀함도 천함도 모두 한결같이 철도의 시간을 지키고 기관차가 통과할 때는 이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철도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민중에게 시간을 엄수할 것을 가르치는 까닭에 이점이 있어 철도는 한국 사람에 대한 문명적 지도자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후일 나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점잖게 차장을 향하여 ‘남대문에 내려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입니다.….”
1939년 열차는 부산에서 북경까지 연결되었다. 정공단의 아이들도 기차를 타고 경성과 중국과 러시아. 유럽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아이들은 아직 일본의 야욕을 몰랐다. 김인태는 세계를 일주하며 세계를 알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꿈은 꿈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언젠가는 현실화시키고 싶었다.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동시 연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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