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시리즈 5

왜 하필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노렸을까?

- 《그리스 로마 신화》 4 -

우리는 앞서 소개한 이 막장 복수극의 상황 설정에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아들 크로노스는 왜 하필이면 아버지의 남근을 노렸을까요? 아니, 어머니 가이아는 왜 아들에게 남편의 남근을 공격하라고 했을까요? 왜 타깃이 남근이 되었을까요?

공모한 상황으로 볼 때 합리적인, 아니 불가피한 설정일 수 있습니다. 우라노스가 사랑에 눈이 멀어 경계를 가장 소홀히 할 때 크로노스가 그 틈새를 노렸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공격자인 크로노스가 자궁 안에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크로노스는 아버지의 남근밖에 공격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남근을 거세하라고 한 여자는 정말 징합니다, 내가 버린 남자가 다시는 다른 어떤 여자와도 사랑할 수 없도록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남근을 제거하려 한 것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 대한 독점적인 친권을 선언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지배자를 숙청하는 쿠데타를 넘어 최고신의 지위를 영구 박탈하고 다시 가이아만이 신의 어머니임을 선언하는 의식은 아니었을까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어머니 가이아의 계획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끼어들어 아버지의 남근을 거세한 아들로 상징화된 크로노스는 뭐가 됩니까? 그는 영원히 그 불명예의 이름을 달고 사는 운명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에게 왜 그런 운명을 안겼을까요? 어머니가 준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을 내려친 크로노스 역시 그 순간 얼마나 소름 끼쳤을까요? 그의 손에 묻은 아버지의 피를 보며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얼마나 몸서리쳤을까요? 이 기억은 분명 크로노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겁니다.

신화는 이렇게 상황을 꼬아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하고 거기서 기구한 운명을 짜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나, 이해할 수 있고 어쩔 수 없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운명이 다시 밑밥이 되어 또 다른 운명을 짜나갑니다. 이 굴레가 막장 드라마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마르지 않는 플롯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이 여기서 나옵니다.

한편, 사랑을 나누려고 가이아에게 평소처럼 들이대다가 남근이 싹뚝 잘려 나가 화들짝 놀란 우라노스는 그만 대지에서 뚝 떨어져 나갑니다. 앞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특이하게도 대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대지에서 뚝 떨어져 나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고 말했죠. 바로 이 사연이고, 이 사건 때문입니다. 깜짝 놀란 가슴 탓일까요, 마음에 상처받아 멍든 탓일까요, 하늘은 지금까지도 저렇게 시퍼렇다고 누군가는 너스레를 뜹니다.

또 잘려 나간 우라노스의 남근은 바다에 떨어집니다. 남근은 물 위를 떠돌면서 흰 거품을 토해냅니다. 그리고 이 거품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납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공모하여 아버지의 남근을 잘라 바다로 던진 그 남근, 거기서 나온 흰 거품, 그리고 그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상상은 막장에서 남근으로 다시 흰 거품까지 성적 상상을 마구 끌어낸 후 이를 사랑으로 포장하고 아름다움으로 상징하면서 다른 스토리의 밑밥을 깝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그려 낼 성적 판타지는 바로 이런 출생의 비밀에서 출발합니다.

아프로디테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아프로디테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신통기》에 따르면,

“다시 가이아에게”

가이아는 스스로 낳은 아들 우라노스에게 하늘을 주며 신의 아버지 자리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늘은 대지에서 떨어져 나가고, 우라노스에게 준 신의 아버지 자리까지 거둬들이며 가이아는 대지의 신으로, 신의 어머니로 다시 홀로 우뚝 섭니다.

이렇게 가이아는 카오스와 결별합니다. 가이아는 창조자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엽니다. 《구약》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자의 미움을 사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창조자와의 결별은 둘 다 공간의 분리로 나타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새로운 공간을 열면서, 《구약》은 창조자의 공간에서 추방당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신화와 《구약》은 모두 새로운 공간에서 이제 홀로서기에 도전합니다.

창조자와 결별을 선언한 대지의 세계는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거세한 아들 크로노스가 새로운 지배자에 오릅니다. 바로 티탄 족의 시대, 제2세대 신의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됩니다. 이 쿠데타의 결과로 아버지는 울타리 밖을 떠돌며 주변을 기웃거리는 존재가 되고, 어머니는 그 울타리 안을 차지하고 그 세계를 품는 존재가 되지 않았나 상상해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인 제우스를 포함한 올림포스의 신들이 바로 이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자손들입니다. 아버지 없이 가이아가 홀로 낳은 우라노스의 손자가 제우스이고, 아버지의 남근을 자르고 권력을 쟁취한 크로노스의 아들이 바로 제우스입니다. 이 운명의 3대에 걸친 가족사는 이어질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밑밥이 됩니다.

여기서 그 하나만 짚고 넘어갈까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펼쳐지는 다이나믹하고 버라이어티한 막장 드라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올림포스 신들의 사랑에 대한 집착이 원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그들의 할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사랑에 대한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왜냐하면 집착은 결핍에서 나오니까요. 더욱이 까닭 없는 결핍은 눈먼 분노를 일으키고, 집착은 마침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올림푸스 신들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때로 주책스럽기까지 하지만 뒤끝이 짠한 것은 그 이유가 우라노스의 결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욱이 자식이 아내와 모의하여 자신의 남근을 거세해 버림으로써 끝내 충족되지 못한 우라노스의 그 결핍에서 비롯된 집착이기 때문에 더욱 안쓰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집착은 질병이지만 이 또한 운명입니다. 주먹을 펴지 못하는 자는 그 안의 새가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래서 더 불끈 움켜쥡니다. 그러나 사실은 손안의 새가 날아가 버린 텅 빈 공간을 더 견디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그 시간을 더 견디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운명이란 시간과 공간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은 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새를 죽이고 맙니다. 그 또한 운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가디언, 2022)

 

최봉수 칼럼니스트
최봉수 칼럼니스트

최봉수

김영사 편집장
중앙 M&B 전략기획실장
웅진씽크빅 대표이사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 리뷰 아시아 총괄대표

주요 저서 <출판기획의 테크닉>(1997), <인사이트>(2013),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

 

 

※ 외부 필자의 기고는 <폴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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