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대선전략상 '보-혁구도'로의 재편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국민정서상 보-혁이라는 이념대립 구도가 거부감이 크다. 그러나 '3김 정치' 이후의 새로운 정치구도의 틀이 '보-혁구도'가 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국가혁신위 회의록 중에서 "정치권을 보-혁 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내용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대선전략을 위해 의도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고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고, 한나라당은 "국가혁신위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인사의 사견을 두고 정쟁화 시키고 있다"며 "보-혁 논란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아직까지 국민통합이라는 국가적 명제가 급선무로 인식되고 있고, 국민대중들이 보수와 혁신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보수와 혁신 구도로 선을 긋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3김식 지역패권 정치'가 끝나가고 집단 이기주의가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혁구도'로 재편될 가능성도 많아 보인다. 그래서 정치권의 '보-혁구도' 재편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보수색' 짙어가는 한나라당-기존 기득권층과 영남 옹호에 치우쳐 문제 될 수도

한나라당 국가혁신위 국가비전분과위(위원장 홍사덕)의 "한나라당이 자민련을 극우로 몰면서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낮춰 정치권을 보수-혁신 구도로 재편해야 한다"는 회의록이 공개돼 한나라당이 대선전략을 보혁구도로 가져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최근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를 '김정일 답방'과 연계시키고, 황장엽씨 방미 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 공화당 매파의 입장을 두둔하는 모습, 언론사주 비호 등 일련의 정치적 공방을 보면 '이념 공세적' 측면이 강하다는 게 민주당 측 인사들의 시각이다.

물론 이총재 주변에 과거 5.6공 인사들이 포진해 있고, '개혁과 보수' 양날개론을 주창하던 이총재의 정치적 행보가 보수적 측면으로 경도되는 것도 한 근거다. 특히,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남북화해에 대해 우려를 감추지 않고 있는 것"도 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한나라당 내 보수적 인사들은 내년 대선을 '보-혁 구도'로 치를 경우 '보수'에 대한 국민적 지지율이 '개혁'을 앞지를 것으로 보고 있고, "이총재가 영남과 보수만 잡으면 대선에서 무난하게 승리할 것"이라는 공공연한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이총재의 보수 강화는 재벌옹호, 비리언론사 사주 비호, 남북화해 협력 지연 등 보수 기득권층에 경도되고 영남지역에 편향돼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총재의 우향우는 국민적 반감이 의외로 커질 가능성도 있다. 당내 개혁세력도 "이총재의 보수편향이 수도권 및 중부권의 개혁적 20∼40대 뿐만 아니라 중도 보수층의 이탈을 재촉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현재 이총재가 내걸고 있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반통일, 수구 기득권 옹호에 더 가까워 한나라당이 이대로 가다가는 고립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경고했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한나라당은 수구,극우세력으로 경도되지 않고 '중도보수를 중심 기반으로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개혁세력이 이탈되지 않도록'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내심 고민중이다.

민주당도 '보-혁대결' 구도 검토-개혁을 앞세운 보수 끌어안기 딜레마

그렇다고 한나라당에서만 '보-혁구도'로의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권 핵심부에서도 차기 대선을 '보-혁구도'로 치르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 정책위의장이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것이나, 민주당 내 정풍운동도 근본적으로 정체성 혼란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개혁강화'를 촉구한다.

동교동계에서도 이대로는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적 지지도를 얻고 있는 이인제든 노무현이든 이 상태에서는 이회창과 겨뤄서 정권재창출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기본적 판단이다. 또 DJP 공조의 위력도 떨어져 득표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현 상황이다.

때문에 여권 핵심부에서는 정치권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한화갑-김근태-노무현 개혁 트로이카 체제'가 곧 '보-혁구도'로의 정치권 재편과 이를 통한 한나라당 개혁그룹의 이탈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도 있다.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는 '화해와 전진포럼'은 이미 만들어져 활동 중이다.

그러나 개혁만을 앞세울 경우 지나치게 급진정권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소수파를 스스로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 가능성도 높다. 특히 DJP 공조 파기에 따른 부담감은 내년 대선에 크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지금 보수와 혁신으로 구분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다"고 못을 박으면서 "개혁과 중도보수를 아우르고 지역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통합적 리더십이 절실한 상황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기본 방향은 대통령도 강조했듯이 '개혁을 중심으로 한 보수아우르기'에 두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기조하에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보수층을 어떻게 흡수해내느냐가 민주당이 갖고있는 근본적인 고민지점이다.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보-혁 갈등' 부추겨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깔려있는 이익집단들의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이기주의의 태동이다. 그 대표적인 이익집단은 재벌기업들로, YS정부의 개혁 추진 과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한결 같이 "재벌권력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면서 "정치권력보다 재벌권력이 더 강한 듯 하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했었다.

DJ정부 출범 이후 DJ개혁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던 재벌들이 반발하면서 '기업규제 완화'를 추진중이고, 자유기업 민병균 원장은 "우익이여 잠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도 정부의 지나친 기업규제와 재벌정책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약분업 추진 과정에서 이미 의사나 약사는 정부를 꼼짝 못하게 하면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이라면 국민생활도 외면한 채 정부를 협박하거나 정당과 국회에 압력을 행사해 왔다.

또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둘러싸고는 사학재단들의 정치권에 대한 집요한 로비로 여야가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었고, 끝내는 사학재단의 비리와 독선적 학교운영을 근절시키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뿐만아니라 노동조합도 그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노동조합 파업도 사회 전반적 측면보다는 노동조합의 이익에 더 많은 관심과 투쟁력을 집중하고, 정부와 국회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민노총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조합 이기주의에 함몰돼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노동투쟁이 고립돼 나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집결해 하루에도 집회와 시위가 몇 건씩 진행되기도 한다. 이렇듯 각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익집단의 사회적 위치나, 특성 및 성향에 따라 '보수와 혁신'이 점차 극명하게 나뉘고 있는 양상이다.

더욱이 만성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될 경우 사회가 80 대 20 사회의 계층적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어, 정치권의 보혁대립구도가 이 계층적 양극화 현상과 결합되면서 사회적인 보혁의 대립구도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보혁구도-'3김 정치'이후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의 가설모델

정치권이 '보-혁구도'로 재편될 것이라는 가장 큰 이유는 '지역적 패권주의에 입각한 3김 정치'의 약화에 있다. '3김 정치'가 힘이 빠질수록 정치적 원심력은 더욱 크게 작용, 차기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정치권력의 힘은 더욱 분산될 것이며, 영남, 호남, 충청지역으로 나뉜 지역적 패권주의가 약화되고 새로운 정치구조가 탄생할 것이라는 관측은 이미 정치권에 큰 대세로 흐르고 있다.

따라서 3김이후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이 아직 형성되있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난 정치권의 보혁갈등이 국민들의 현실적 이해관계와 결합되면서 3김이후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으로 '보혁구도'가 하나의 가설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검토를 해야 할 가설 모델일 뿐이다.

남북분단시대라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국론분열에 대한 각계각층의 우려가 큰 상황에서 '보-혁구도'는 자칫 분열주의로 몰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국민들이 이념적 측면에서 보수와 혁신을 구분해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현 상황이다.

지금 정가의 이슈가 되고있는 '보-혁구도'로 재편 문제는 사실상 정치권 내부의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적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국민들은 보수와 혁신으로 구분해 보기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처해진 상황에서 정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권이 무리하게 '보-혁구도'로 재편하려 할 경우 국민들에게 반감을 살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자연스럽게 보수와 혁신, 그리고 중도파가 공생하며 경쟁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 마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영술 기자newflag@ewinc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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