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전역이 대선 결과를 둘러싸고 사상초유의 정치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제 플로리다 팜 비치 지역 등의 재투표 등을 둘러싼 법적 논쟁과 갖가지 예측 시나리오에 모든 이의 관심이 온통 몰려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번 선거의 내용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보면 아이러니하게 최고의 승자는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한때 토플러와 같은 미래지향적 지성으로 대접받다가 예산안을 둘러싸고 연방정부의 마비와 이후 클린턴 탄핵정국을 주도하다가 엄청난 국민적 비난 속에 하루아침에 역사의 뒷 무대로 퇴장해야만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모든 정치평론가로부터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저격수의 상징으로서 조소거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취재하면서 본인은 그의 '미래지향적'(?) 통찰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그가 현재 자신의 새 과제로 매달리는 생명공학의 화두에 감탄해서가 아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비록 당시 탄핵주도를 통해 자신과 공화당의 추락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물귀신작전으로 클린턴, 고어의 이미지에도 상처를 입혀 결국 부시의 선전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출구조사 내용을 보면 후보자의 자질로서 정직성과 신뢰도(24%), 강한 리더십(14%)에 유권자들이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고 이들 중 다수가 부시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정확히 어느 정도 당락에 영향을 끼쳤는가와 설문항의 정확도는 이후 자세한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부시와 고어간의 근소한 표 차를 생각하면 그 중요성은 무시할 수가 없다. 이러한 클린턴 효과는 많은 이들을 당혹케 하기에 충분하다. 자연히 생길 수 있는 의문은 개인적으로는 클린턴의 도덕성을 비난해도 여전히 국민들은 클린턴의 공적 업무를 높이 평가하고 있지않냐는 것이다. 또한 더구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과 무관한 고어가 클린턴의 도덕적 문제로 동반 추락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모순 같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세심히 이해해야 할 것은 탄핵정국을 통해 국민들이 비록 공인으로서 클린턴의 탄핵을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클린튼, 고어 정권의 도덕성, 위선, 당쟁의 책임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어는 당시 클린턴 정권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였다. 지금의 그로서는 엄청 후회스런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깅그리치의 정권 무너뜨리기 작전은 샤퍼 라는 정치학자가 이름 붙인 '다른 방식의 정치'의 전형이다. 그는 미국에서 선거라는 가장 중요한 정치양식의 중요성이 퇴조하고 공직자 임용저지, 조사, 언론 폭로전 등이 가장 중요한 정치의 방식이 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이미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경향이다)
이 탄핵 시도가 이미 선거전을 돌입하기도 전에 고어를 반쯤 무너뜨렸다면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의 정치'는 쿠바 난민소년 곤잘레스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용해 공화당은 쿠바계 보수적 망명인들의 반민주당 감정에 불을 질렀었는데 묘하게도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플로리다에서 남미계열표는 부시에게 몰 표를 던져주었다.
그런데 샤퍼를 비롯해 누구도 예측 못한 종류의 '다른 방식의 정치'가 이번에 등장하였다. 바로 다름 아닌 선거결과를 둘러싼 정치이다. 현재까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이 '다른 방식의 정치'의 관점에서는 고어가 이번 게임의 승자로 보인다. 이는 다름 아닌 네이더 변수와 연관해서 그러하다. 다시 한번 선거의 내용을 환기해 보면 플로리다, 뉴멕시코, 오레곤등 박빙의 승부 처에서 네이더 3당 후보의 표는 결정적 작용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선거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고어의 그간 네이더 비난이 두 가지 점에서 부당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워싱톤 포스트지 데이빗 브로더가 지적한 것처럼 이번 선거에서 수입이 높을수록 투표에 참여하는 경향이 과거보다 더 커졌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1994년 5만불이하 가계의 투표율이 63%이었던 것이 1996년 61%이고 98년 52%에 이어 이번에 47%라는 것이다. 반면 5만불 이상 수입의 층이 96년보다 14% 증가했다. (물론 이러한 수치는 인플레이션이나 신경제의 효과로 인한 경제적 붐으로 인해 생긴 수입의 증가 등을 고려하더라도 폭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출구조사의 결과는 이후 자세히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지난 8년간의 클린튼, 고어 정권의 사회 복지 삭감 등의 중도주의 정책이 하층보다는 중산층 이상을 겨냥해온 귀결로 해석될 수 있다. 저소득층의 이해가 제대로 대변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인 이들이 고어에게 실망하는 것은 이해할 만 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감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정권에 있는데 오히려 이 좌절감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비난하는 것은 교묘한 책임의 전가가 아닐 수없다.
또 하나 재미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승부의 분수령 플로리다에서 지금의 난관을 자초한 것은 네이더가 아니라 오히려 고어의 보수주의적 범죄와의 전쟁이다라는 점이다. 살론 닷컴의 부르스 샤피로에 따르면 고어의 강경한 마약과의 전쟁은 플로리다 흑인의 3분의 일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이 경력 때문에 이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흑인의 90%가 민주당 열성지지임을 생각할 때 이는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위의 두가지 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간 8년간 민주당의 성공의 원인이자 좌파로부터 비판받아온 핵심 정권 이념은 중도주의적 경제, 보수적 범죄정책, 점진주의적 사회안전망 건설로 집약된다. 그런데 바로 이 성공의 원인이 바로 동시에 민주당 정권의 무덤을 파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선거과정에서 네이더에게 문제를 전가하는데 성공한 고어는 선거후 공방을 다시한번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즉 선거후 불가피하게 제기될 민주당의 중도주의적 기조, 금권적 양당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일단 회피하고 다시 양당간 대립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해외 부재자 투표의 결과가 고어에게 불리하고, 경제가 불안해지는등 이번 선거에서 고어의 패배로 상황이 몰아져가도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볼 때는 고어가 이번 위기의 진정한 승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적절한 시점에서 고어가 감동적 연설로 양보를 선언하고 물밑으로는 최대한 법적 지구전으로 부시정권을 괴롭힌다면 4년후의 민주당으로의 정권이양은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깅그리치와 부시 합작의 '다른 방식의 정치'처럼 말이다. 이미 파네타 전 클린튼 비서실장과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장관등은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고어의 대승적 양보를 권하고 있다. 이후 전략적 시점에서 고어의 입을 통해 나와야 할 말을 아무 생각없이 하고 있는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거나 이기적이다. 만약 고어가 이후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목이 메이는 듯 한 연설을 해낸다면 대통령병환자, 분쟁만 일삼는 정치인이라는 현재의 고착화된 이미지를 깨뜨리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탄핵정국의 결과로서 이번 선거와 선거후에 보여지는 이러한 '다른 방식의 정치'는 비록 교대로 공화당과 민주당에 권력을 안겨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신뢰감의 상실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루고 있다. 전 세계 전자민주주의를 선도한다고 공언하던 미국이 투표용지하나 제대로 디자인하지 못하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쿠바의 카스트로는 자국에서 선거감시단을 파견하겠다고 조롱을 해대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신뢰위기를 감지한 소심한 지식인들은 뉴욕타임즈나 워싱톤지의 논설을 통해 연일 찢겨진 미국의 재통합을 호소해대고 있다.
이번 미국의 '다른 방식의 정치'를 보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은 과연 어떠한 교훈을 배우고 있을 까 궁금해진다. 미국 못지 않게 이러한 방식의 정치가 활성화되고 저격수가 많은 한국이니까 말이다. 아무쪼록 생산적 교훈을 얻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간의 대선 현지 취재를 클릭 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안 병진.
Nsfsr@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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