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부와 클린턴 대통령이 노근리 사건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공식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실질적인 배상, 보상이 따르지 않는 면피성 성명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고, 피해 당사자들은 법적 소송에 들어갔는데...

한·미 양국 정부는 12일 노근리사건 조사에 관한 공동발표문을 통해 "노근리사건은 철수중이던 미군에 의해 피난민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하였고, 빌 클린턴 대통령도 "노근리에서 한국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미국정부가 한국전쟁중 발생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 실체를 인정하고 미국 대통령이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또 미국정부는 사과와 함께 앞으로 피해주민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추모비 건립과장학사업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공동발표문이 나온 후,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날 전화통화에서 김대통령은 " 한·미양국민의 큰 관심사가 되어온 노근리사건에 대해 양국이 공동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후에도 한·미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희망했다"고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은 밝혔다.

유감표명 역사적 성과나 보상,배상 없는 '면피성 성명'

미국이 전쟁중 발생한 양민학살의 실체를 인정하고 미국대통령이 유감표명을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 조치이다. 또한 한국이 미국과 대등한 협상자세를 유지하면서 빌클린턴 대통령이 '유감표명(deeply regret)을 이끌어 냈고, 성명서에서 'deeply regret'라는 표현을 쓸 때는 외교적 관례상 '사과(apology)'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외교적 성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매우 이례적으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의 유감표명에서 며칠후 물러날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에 대해, 미국이 민감하고 부담스런 노근리사건을 안보문제에서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에 넘기지 않겠다는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 정부도 사격명령 등 사건의 고의성 부분에 대한 미국측의 조사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클린턴 임기 내에 문제를 마무리하려는 의지를 보여왔기 때문에 양국정부는 클린턴대통령의 '유감표명'이란 고육지책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표명으로 노근리사건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는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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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노근사건 공동발표문
클린턴 노근리사건 성명전문
노근리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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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2일 한미 공동발표문에서는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라고 규정되었으나 클린턴 대통령 성명에는 양민학살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아 '면피성 성명'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또한 보상, 배상이 따르지 않고 추모비 건립, 추모장학기금 마련 선에서 마무리 지은 것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피해자들이 미국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변호인단을 통한 소송 제기를 적극 검토하고 있어 민간차원에서는 사안의 종결이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번 미국정부가 민간인 학살의 실체를 인정한 유감표명이 사건 실체, 공중 및 지상공격, 사격명령 등에 있어 피해주민들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됐다는 점에서 추후 전개될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보고 있다.

노근리주민들과 시민단체 '클린턴 성명 미흡'

이번 사과성명이 역사적인 성과이긴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라는 반응이다. 충북 영동지역의 노근리양민학살 사건 희생자유족과 주민들은 11일 클린턴대통령의 유감성명을 듣고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알맹이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주민들은 "미국정부의 성의없는 태도가 우리정부의 저자세 외교에도 책임이 있다"며 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지난 50년당시 노근리에서 미국 총격으로 한쪽 눈을 잃은 양해순씨의 아들 안병인(40)씨는 "미국의 사과와 대책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고 잘라말하고 "미국을 상대로 민사재판을 통해 실질적 보상과 만족할 만한 수준의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말했다.

노근리 대책위의 정구도 대변인은 "클린턴 대통령의 이번 발표는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미국 정부는 상부로부터의 사격명령을 부인함으로써 학살을 인정치 않았으며, 이는 미국 정부가 처음부터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 축소 목적을 갖고 조사한데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의 차승렬 사무국장도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를 며칠 남겨두지 않고 이같은 성명을 발표한 것은 노근리사건을 임기내 적당히 마무리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선 진실차원에서 한미 양국이 접근해 진상을 명확히 밝힌 후 배상문제를 거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야는 12일 한미 공동발표문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김영환 대변인은 논평에서 "미국이 양민학살 사건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통령이 직접 사과한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강력한 진상규명 의지와 미 대통령의 진지한 자세가 이뤄낸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노근리사건 해결 촉구를 위한 의원모임'의 한나라당 소속의원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측은 사과가 아닌 유감을 표명함으로써 너무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미국측의 진솔한 사과를 촉구했다.

피할 수 없는 노근리 배상사건

노근리 사건의 미국내 변호인단은 11일 미육군의 조사보고서 내용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최(한국명) 변호사와 나치 배상 소송으로 유명한 로버트 스위프트, 마이클 고스 변호사(이상 미국) 등 변호인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 육군부 보고서는 피해자들이 50년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온 사건을 이제야 시인하면서도 책임을 병사와 하급장교들에게 돌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변호인단은 △서면에 의한 육군장군의 공식 사과 △노근리 다리에 100만달러 규모의 추모비 건립 △사망자 1인당 50만달러의 배상금 지급 등을 요구하고 "피해자들은 요구 사항이 관철 될 때까지 미 육군과 싸울 것"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공동발표문은 한국측에선 피해주민들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하고 미국측으로선 참전장병들의 명예를 고려하는 데 우선점을 두고 작성되었지만, 사실상 미육군장교의 공식적 사과없이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말에 물타기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양상이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미군들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서도 50년간 침묵의 생활을 보낸 노근리 피해주민들의 법적 보상문제 소송에 대해 한미 양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홍준철기자 jchong2000@ewinc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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