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승리로 대통령에 오른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은 에스트라다 前정부가 저질러놓은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기득권층의 재등장을 염려하는 빈민층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번에 집권한 필리핀 신임 대통령 글로리아 아로요(53)는 60년대 초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아로요 신임대통령은 미 워싱턴 조지타운대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동문수학한 경제전문가로 92년과 95년 두 차례 상원의원을 지낸바 있다. 이후 98년에는 피델 라모스 전대통령이 주도하는 '라카스'당 후보로 부통령에 출마, 직접투표에 의해 당선됐다.
그녀는 지난해 10월 대통령의 뇌물 스캔들이 터지자 바로 대통령 하야 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루이스 싱손 술루주 주지사가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탄핵재판이 열렸고 뇌물수수, 주가조작 지시, 800억원 가량의 비자금 조성 등 갖가지 비리가 알려지면서 결국 에스트라다는 실각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때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무죄를 주장하며 탄핵결정권을 쥔 상원의 지지와 군의 중립을 믿으며 버티려 하였으나, 19일 앙헬로 레예스 군참모총장과 메르카도 국방장관이 사임후 시위대에 합류하고 상원도 사임을 요구함으로써 그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다.
빈곤퇴치냐 국민통합이 우선이냐

아로요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2004년까지 전체 국민의 30-40%에 달하는 빈곤층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하는 등 빈곤문제 해결을 국내정치의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또 그녀는 진정한 개혁을 위한 정치제도 개혁,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는 리더십 창출, 사회의 도덕성 고취 등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 아료요 대통령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우선 아로요 대통령은 두 번째로 여성 대통령에 올랐으나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갖추지 못해 '약체 대통령'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실정으로 정정 불안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 가문에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점 등이 저소득층과 갈등도 초래할 수 있어 향후 계층간의 국민통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특히나 필린핀의 현대 정치사가 소수의 정치명문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농민과 빈민계층의 반발을 산 것도 사실이다.
과거 마르코스, 코후앙코, 라우렐, 막사이사이 등이 대표적인 경우로, 지난 대선 당시 농민, 빈민계층에 기반을 둔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이 라우렐 전 부통령을 큰 격차로 따돌리 수 있었던 점도 이러한 정치적 반발의 연장선상이었다.
아로요 대통령은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이에 에스트라다는 아직도 30~40%에 달하는 빈민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미련 속에 아로요 신임대통령에게 반격의 포문을 열기도 했다.
에스트라다는 아키리노 피멘텔 상원의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야로요 대통령은 부통령 직무대행 중이며, 자신이 여전히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 재신임을 묻겠다는 등 아로요 신임 대통령 흔들기에 여념이 없는 상태이다.
또한 에스트라다 사법처리 문제, 민다나오 회교 반군 문제 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 실정이다. 세계화 추세에 따른 '농업부문 등 시장개방'문제는 절대 다수의 빈곤층 국민들이 반발이 예상돼 그녀의 정치적 시험무대가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메르카도 국방장관 사임과 에스티노사 해병대 중장이 쿠데타 설 등으로 새정부 시작부터 잡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은 이러한 불안감보다는 아로요호의 순항을 더 믿고 있는 실정이다.
기득권층의 재등장을 염려하는 빈민층의 신뢰 확보가 급선무
신임 대통령은 지난 24일 밤 하원 대변인 선거에서 아로요를 지지하는 소수당의 필레시아노 벨몬테를 새 대변인으로 선출하면서 하원을 장악하였으며, 에스트라다 전대통령의 친구이면서도 탄핵재판에서 아로요를 지원한 피멘텔 상원의장이 탄핵재판 재개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상·하의원 모두 장악한 셈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법적대응과 차기선거에서 재기를 노리는 에스트라다와 그 가족들에게 출국금지와 6개분야에 걸친 범죄 혐의 수사 시작, 금융계좌 및 재산 동결조치로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등 '에스트라마 힘빼기'에 들어갔다.
그녀의 입지를 가장 확실하게 해준 것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아로요와 전화통화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돕겠다'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상태이다. 나아가 부시는 올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담에 참가하기에 앞서 필리핀 방문을 수락까지 하였다.
이는 '세계경찰국가'로 불리는 미국의 탄탄한 지원과 더불어 경제적 위기도 넘길 수 있는 지원도 함께 얻어낸 일석이조의 외교성과이다.
또 호르스트 쾰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제임스 울페슨 세계은행총재는 24일 잇따라 민주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필리핀을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이끌어내는 성과도 이루었다.
분명한 사실은 아로요 대통령은 부패와 독직혐의를 받아온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1986년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끌어내린 민권(民權)혁명의 재연이다.
따라서, 아로요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에스트라다 前정부가 저질러놓은 부패정치, 정실인사 청산에 주력함은 물론, 정정불안으로 추락일색이던 경제를 되살려 다시 기득권층의 재등장을 염려하는 30-40%에 달하는 빈민층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