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이야기] 외국 연구자들과 소통하다 보면, 한국에서 당연시하는 것이지만 외부의 시각에는 낯선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종종 있다. 바다와 관련된 사항 중에는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바다와 갯벌을 ‘밭’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조류를 채소처럼 판매하며 먹는다는 것이다. 바다를 갯밭, 우미밭, 전복밭, 굴밭, 바지락밭, 미역밭 등으로 부르고, 해조류를 일상의 채소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이 바다를 삶의 공간으로 얼마만큼 가깝게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갯벌을 밭으로 일군 남해안의 갯벌밭

남해안 갯벌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밀물 때는 바다로 덮였다가 썰물 때 드러나는데 갯벌에는 드문드문 대나무가 꽂혀있기도 하고 두둑으로 경계를 만들어 놓기도 하여 전답(田畓)과 같은 경작지의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물때에 따라 밀물에는 바다로 잠기고 썰물에는 갯벌 해산물을 기르는 밭이 되는 곳으로, 물때에 따른 갯벌 이용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수 묘도동 갯벌밭[사진=송기태]
여수 묘도동 갯벌밭[사진=송기태]

갯벌밭(갯벌양식장)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 남해안 일대에 넓게 확산되었다. 주민들은 이러한 갯벌을 채취 품종에 따라 굴밭, 바지락밭, 꼬막밭 등으로 부르며 육지의 밭처럼 인식한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섬진강 하구와 전남 완도 일부 지역에서 갯벌에 지주를 세워 김양식을 했고, 전남 고흥 해창만 일대에서 갯벌에 ‘살피’라 불리는 담을 둘러 굴양식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양식어업 증진정책에 따라 갯벌양식어업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갯벌을 구획한 갯벌밭도 남해안 일대에 광범위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주된 갯벌양식 품종은 김과 굴이었고, 갯벌밭의 형태를 띤 것은 굴양식장이었다.

갯벌을 논밭처럼 구획한 고흥의 갯벌밭

고흥지역은 갯벌마다 듬성듬성 대나무를 세우거나 농지처럼 두둑과 이랑으로 점유지의 경계를 표시한 곳이 많다. 일제강점기 최대 굴양식지였던 해창만은 거대한 농지처럼 갯벌밭을 형성하였는데, 1964년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모두 농지로 변해버렸고 어업조합은 고흥수협으로 통합되어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간척이 진행된 득량만과 해창만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져 온 갯벌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갯벌에 경계를 구획하여 개인별로 밭을 점유하고 있는 점은 남해안 갯벌양식의 중요한 특징이다. 공식적으로는 총유의 공간이고 어촌계 단위로 면허를 얻어 양식을 하기 때문에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없으나, 마을마다 오랜 기간 관행으로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전남 고흥 남양면 중산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작성한 굴밭 지도 <모려양식장도(牡蠣養殖場圖)>가 전한다. 굴밭 지도에는 마을 앞 갯벌의 지형을 그려놓고 그 사이에 굴밭의 경계를 촘촘하게 표시한 후 각각의 밭마다 점유자의 이름과 번호를 기재해 놓았다. 또 지도가 실제 지형을 정확하게 반영하였음을 제시하기 위해 축척이 1 : 2,400임을 표기하고, 다시 일본어로 ‘圖上ノ五厘ヘ地上二間ニ當ル’라고 기재해 놓았다.

일제강점기 굴밭 지도(고흥 중산리)[사진=송기태]
일제강점기 굴밭 지도(고흥 중산리)[사진=송기태]

전남 고흥 중산리에서 굴양식의 시작 시기는 1930~40년 무렵이다. 당시는 이미 해창만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 굴양식이 확산된 이후이다. 해창만에서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돌담으로 경계를 구획한 굴밭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제는 1906년~1907년 양식 적지를 조사해 양식 유망지를 파악하고, 1923년 수산시험장에서 부산 가덕도에 굴양식을 시험했다. 가덕도에서는 남해안에 알맞은 방법으로 이랑을 만들고 돌을 뿌려 굴을 부착할 수 있게 도왔는데, 시험 성적이 좋아 평안·충남·전남 등의 도별로 굴양식 시험을 활발하게 실시했다. 20세기 초 전남 고흥뿐 아니라 남해안의 거제도, 한산도, 사천만, 여자만, 강진만 등의 남해안 전역에서 굴밭이 형성되었다. 현재는 고흥과 보성지역에 주로 남아있다.

고흥 남성리 갯벌밭[사진=송기태]
고흥 남성리 갯벌밭[사진=송기태]

남해안 일대에 넓게 확산된 갯벌밭

갯벌에 경계를 구획하여 개인별로 밭을 점유하고 있는 점은 남해안 갯벌양식의 중요한 특징이다. 어촌계 단위로 면허를 얻어 갯벌에 양식을 하기 때문에 사적 소유권은 인정받을 수 없으나 마을마다 사적 점유를 인정하는 관행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양식어업은 육지의 경작과 같아 자본과 노동력이 일정한 공간에 투입되기 때문에 항상 ‘소유권’의 문제가 발생한다. 갯벌에서 패류를 양식하기 위해서는 품종에 맞게 갯벌을 개간하고 치패를 살포하거나 굴 유생이 부착되도록 인공적인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농작물을 가꾸듯이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갯벌밭 형태는 고흥지역을 중심으로 통영과 강진 일대까지 넓게 분포한다.

장흥 수문리 갯벌밭[사진=송기태]
장흥 수문리 갯벌밭[사진=송기태]

바다와 갯벌을 밭으로 인식하거나 부르는 관념은 일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미역 생산지를 ‘곽전(藿田)’이라고 하여 밭의 개념을 사용하였고, 물고기인 조기가 나는 바다도 ‘파시평(波市坪)’이라고 하여 평야처럼 인식하였다. 이러한 바다밭 문화가 20세기 현재까지 바다유산으로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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