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국가적 관심 필요

'섬'은 고립과 소통이라는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지닌 공간이다. 장보고의 완도 청해진처럼 대외 교류의 통로가 되었던 사례도 있지만, 한국사에서 섬은 종종 누군가를 격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외부와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특성 때문에 국가권력은 어떤 집단을 분리하거나 은폐하려 할 때 섬을 선택했다. 이러한 섬의 숙명은 근현대사의 아픈 단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길게 드리워졌던 '감화원(感化院)'의 그림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감화원은 표면상 소년범을 교정하고 재교육하는 사회복지시설로 규정되었다. 일제는 1923년 9월 「조선감화령」을 제정해 감화원을 제도화했고, 같은 해 12월 함경남도 원산 송전만에 첫 감화원(영흥학교)을 설치했다. 감화령은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 중 불량행위를 하였거나 그 우려가 있으며, 적절한 친권 행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자'를 수용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불량행위의 우려'라는 모호한 문구는 사실상 광범위한 강제수용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다. 부모가 없거나,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단순히 보호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도 감화원에 보내질 수 있었다.

원산 감화원 설치 이후 약 10년 동안 추가 시설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사회통제를 강화하면서 감화원 증설이 논의되었다. 초기에는 서울 근교 설치가 검토되었으나, 1937년 이후 전남의 여러 섬이 후보지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섬이 가진 고립성과 통제 용이성을 감화원 운영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결국 목포항 앞바다의 고하도가 최종 후보지로 결정되었다.

1938년, 당시 무안군이었던 고하도 용머리 서쪽 해안가에 두 번째 감화원이 조성되었다. 감화원은 주민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점에 세워졌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1939년 6월 11일 정식 개원식을 가졌으나, 이 시기는 국가총동원법 시행(1938년) 이후로 전시동원 체제가 강화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외딴 섬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순수한 복지시설을 운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39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보도는 당시 운영 실태를 잘 보여준다. 개원 당시 원생 33명 중 최저 연령은 8세(2명), 최고 연령은 16세(1명), 11세가 7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24명이 '저능아'로 분류되었고, 보호자가 없는 아동은 18명에 달했다. 대부분 친척조차 없는 고아였다. 이는 감화령이 내세운 '불량행위 교정'과는 무관하게 돌봄 사각지대 아동이 대거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고하도 감화원은 교정·갱생시설이 아니라 아동을 한곳에 몰아넣는 격리기관으로 운영된 셈이다.

명목상의 목적과 달리, 감화원의 실질적 기능은 전쟁기 일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황국신민 양성'에 가까워졌다. 총독부는 감화원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구실로 명칭을 '국립학원'으로 변경했지만, 그 속내는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만드는 데 있었다. 지금도 현장에 남아있는 교문 기둥의 '國立木浦學院(국립목포학원)'이라는 글씨는 이러한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감화원이 지닌 폭력성과 비인권적 운영은 선감도 감화원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1941년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또 하나의 감화원이 세워졌는데,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아 선감도』(1995)에서 당시 삶을 '굶주림과 폭력의 연속'으로 묘사했다. 탈출을 시도하다 물에 빠져 사망하는 일이 잦았고, 고문과 폭행은 일상이었다. 견디지 못한 아동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감화'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현실은 심각한 인권 침해 현장이었다.
![1954년 고하도 감화원 일대 항공사진 [사진=국토정보플랫폼]](https://cdn.polinews.co.kr/news/photo/202511/713967_527939_55.jpg)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이 해방 후에도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고하도 감화원은 1967년 12월 20일 공식 폐쇄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신문에는 '정신박약아와 불량아를 수용하는 시설'로 소개되었다. 1954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고하도 감화원에는 140명의 정신박약아가 수용되어 있었고, 심리검사 결과 이 중 60명이 '정상'으로 판정되었다. 많은 아동이 본인의 사정과 무관하게 강제수용된 것이다. 이는 실적을 채우기 위한 무분별한 수용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고하도 감화원의 폭력성은 희대의 '대도(大盜)' 조세형(1938년생)의 증언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는 1999년 목포에서의 간증에서 "유년기의 기억은 몽둥이로 맞던 일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시립고아원에서 고하도 감화원으로 옮겨진 그는 그곳을 "더 큰 범죄자를 만드는 장소"라고 표현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잦았다는 증언도 남겼다. 이러한 정황은 신문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1962년 『경향신문』은 혹독한 구타를 피해 탈출한 원생 4명 중 1명이 실종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운영 방식이 해방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고하도 감화원 부지는 현재 고하도 용머리 서쪽 해안, 목포대교 아래에 위치한다. 폐쇄 후 최근까지 중증장애인 사회복지시설 부지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활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인근에 목포해상케이블카 고하도 승강장이 들어섰지만, 이곳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가슴 아픈 역사가 응축된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문조차 없다.
그럼에도 현장에는 여전히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해안가에는 감화원 전용 부두의 흔적이 남고, 입구 양쪽에는 석조 기둥이 있다. 오른쪽 기둥에는 '國立木浦學院'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교문이 '바다를 향해' 세워진 것도 특징적이다. 들어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가는 것은 어렵다는 구조로, 감화원이 지닌 강제성과 폐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변에는 석조 사각 건물, 우물 두 기, 일제강점기 축대와 계단 등도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하도 감화원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감화원으로, 일제의 사회통제 방식과 섬이라는 공간의 고립성이 극대화된 사례다. 1938년부터 1967년까지 약 30년 동안 누군가는 이곳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 흔적은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임에도 지금은 아무런 표지조차 없다. 사유지라는 이유로 행정적 조치가 지연되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안산 선감도에서는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작은 기념관과 추모비가 세워졌고, 피해자 명예 회복 작업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고하도 역시 섬이 지닌 '고립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현장이다. 이 공간이 품고 있는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기록과 보존을 위한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등록문화유산 등록과 함께 역사공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강구되기를 기대한다.
최성환 교수는 목포항과 다도해를 중심으로 해양사와 지방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이다.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추진하는 '섬 인문학 연구단'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 과제는 "섬 인문학, 인문지형의 변동과 지속가능성"이다. 역사 속 섬사람들의 인문환경 변화와 그에 대한 대응에 주목하고 있다. 국립목포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이며, 국립해양유물전시관·전남농업박물관 등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목포(대한민국 도슨트)』,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해시말』, 『유배인의 섬 생활』, 『역사 논문 쓰기 입문』 등이 있다. 섬 관련 논문으로는 「암태도 소작쟁의의 주요 인물과 쟁의의 특징」, 「표류 사건을 통해 본 섬 공간의 소통성과 인문지형 변동」, 「비금도 천일염전 개발과정과 사회적 확산」, 「러일전쟁기 일본해군의 옥도 팔구포방비대의 설치와 활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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