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대학살 사적지인 프놈펜 뚜얼슬렝 대량학살 박물관 모습[사진=연합뉴스]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대학살 사적지인 프놈펜 뚜얼슬렝 대량학살 박물관 모습[사진=연합뉴스]

[폴리뉴스 김만흠(폴리뉴스 논설고문, 전 국회입법조사처장)] 이재명 대표가 윤석열의 계엄이 관철됐으면 국민 수천, 수만이 무인도에서 바다에서 죽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탄핵 반대를 외치는 보수 세력의 광주 집회와 이를 호위하는 국민의힘을 전두환의 쿠데타 세력과 등치시키며 성토한 글이다. 잠시 실용주의를 꺼내더니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자신을 향한 사법 시계가 째깍거리는 상황에서 헌재 탄핵 심판마저 논란을 부르며 흐릿해지자 다시 꺼낸 증오와 적개심의 정치다.

물론 비상계엄은 시대착오적이고 황당했다. 국회의 해제 요구로 몇 시간 만에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국회 통제를 포고령 1호에 넣고, 군을 국회에 투입시킨 것은 헌법이 규정한 비상계엄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었다. 위헌의 소지가 크다. 국회의 무력화 시도는 국헌문란의 내란죄가 될 수도 있다. 위헌 소지는 비교적 분명해 보이지만, 내란죄는 다툼의 여지가 없지 않다. 윤 대통령 측에서는 위헌적 요소도 결국 국회의 요구에 따라 계엄 해제로 걸러졌다고 항변하고 있다. 글쎄, 법원이나 헌재가 그런 항변을 인정할까?

위헌적 비상계엄 시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는 내란죄 등으로 탄핵소추를 했다. 국민의 실망, 분노도 함께 했다. 내란, 외환의 죄가 아니고는 형사 소추할 수 없는 현직 대통령 신분이기 때문에 내란 혐의의 소추를 불렀다. 내란죄는 반역, 반국가적 범죄로 국민의 규탄 처단 대상이다. 민주당 등 야당은 내란죄 프레임으로 여당과 정부를 압박하고 공격했다. 그럴 만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에 따르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부 인사들을 모두 내란 동조자로 공격한 것은 과도한 내란죄 몰이였다.

한덕수 대통령 대행의 탄핵과 이어지는 최상목 대행에 대한 압박에 이르러서는 여론의 역풍이 감지됐다. 비상계엄 탄핵과 사법적 책임을 추궁당하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오히려 역진하는 기이한 상황이 전개됐다. 과도한 내란 프레임뿐 아니라, 이를 주도하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에 대한 비호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내란죄 프레임으로 지지세력을 동원한 민주당의 포퓰리즘이 상대 보수세력의 포퓰리즘으로 이어졌다. 공수처의 애매한 역할과 행보, 이어진 헌재의 정파성 논란은 보수세력의 자기정당화 여지를 키웠다. ‘윤 대통령 석방’ ‘탄핵 반대’를 구호로 한 보수세력의 장외집회 규모도 점점 커졌다. 민주당의 독점지대라는 광주에서 보수 진영의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상황이 됐다. 광주에서 열린 보수진영 초유의 대규모 집회였다. 5.18 정신과 오늘의 민주당, 그리고 보수세력의 집회 허용 논란, 따져 볼 여지가 큰 심각한 주제다.

이 상황에서 이재명 대표가 실패한 계엄의 엄청난 위험성을 꺼내며 경고한 것이다. 계엄이 그대로 시행됐으면 수천, 수만 명이 바다에 수장되는 한국판 킬링필드 상황이 됐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설픈 윤석열의 계엄이 그런 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거라고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권력은 잔인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람 중에서도 캄보디아의 폴 포트 같은 사람이 있다면 모르겠다. 

권력투쟁을 동반하는 정치는 일정하게 적과 동지를 나누는 싸움이 불가피하다. 이 부분에 주목했던 독일의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정치 현상을 두고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슈미트의 시각은 나찌의 정치이론을 뒷받침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듯이 상대와 싸우는 권력투쟁이 불가피하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민주주의는 적과 동지의 생사 싸움의 원리가 아니다. 서로 시각과 입장이 다를 수 있고 경쟁하지만 더불어 사는 공동체 원리다. 이게 불가능하면, 민주주의에 기초한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국가체제 구성원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어렵다. 폭력과 위력으로 강제하는 전체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민주화 투쟁 시기에 독재정권은 타도해야 할 적이었다. 거의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우리나라는 이 과정을 거쳤다. 정권교체를 거쳤고, 비판 민주화 세력이 이미 정치적 기득권 세력이 된 지 오래다. 두 번의 정권교체를 거쳐야 적대적 대결이 해소되고 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헌팅톤(S. Huntington)의 명제도 우리나라는 이미 넘어섰다. 그런데 여전히 죽기살기 적대적 전쟁의 정치를 하고 있다. 비전이 아니라 적개심을 이용한 나쁜 정치는 비극과 상처의 아픈 재난까지도 늘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재난의 정치 도구화였다.

이제 권력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 논리를 자신에 대한 성찰로 전환시켜야 한다. 물론 ‘분노는 나의 힘’이라는 명제처럼 적개심과 증오는 아주 유용한 정치적 동원 에너지이다. 그렇더라도 한국판 킬링필드라는 수사까지 빌리며, 미래 전망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흐리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자기 비전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적개심을 동원한 리더십은 종교든, 정치든 기만이다. 파시즘이 그랬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적을 공격하는 구호가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자기실천이 되어야 한다.

 

                    김만흠 폴리뉴스 논설고문
                    김만흠 폴리뉴스 논설고문

김 만 흠

폴리뉴스 논설고문

전 국회입법조사처장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장

가톨릭대학교 교수

한성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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