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16주기 추도식에서 권양숙 여사와 노 전 대통령 아들 노건호씨,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등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2025.5.23 [사진=공동취재=연합뉴스]](https://cdn.polinews.co.kr/news/photo/202505/694976_505597_3948.jpg)
[폴리뉴스 차재원 칼럼니스트] 대통령 선거 후보자 제2차 토론회가 열린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소환됐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제16주기. 당일 오전 묘소를 참배했던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그를 언급한 건 자연스러웠다. 당장 민주당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이란 정치적 인연이 있다. 이 후보 지향점이 그의 좌우명과 일치하기도 했다. "국민과 소통하면서 권위를 버리고 오로지 사람 사는 세상을 원했던 분이셨습니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원하셨지만 여전히 반칙과 특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 증표로 이 후보는 12.3 비상계엄과 내란을 지목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 진짜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자신이 "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한술 더 떴다. 첫 인사말과 마지막 발언 모두 "노무현 정신"을 언급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의 있습니다'라는 외침이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뒤 민주당과 국민의힘 합의로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 이른바 '호텔 경제학' 비판을 반박한 이재명 후보를 겨냥, "바보 노무현"으로 직격했다. "국민을 바보라고 조롱하는 후보가 감히 노무현을 입에 올리는 세상에서 '진정한 노무현 정신은 어디 있나'라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도 노 전 대통령을 비껴가지 못했다. 토론 전 공개한 메시지에서 각별한 추도의 뜻을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바위처럼 단단한 기득권에 맞서 싸우고, 늘 노동자와 약자의 편에 섰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약속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뜨겁게 일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모든 권력을 국민께 돌려드리는 국민주권 개헌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진영을 떠나 여야 유력 대선 후보가 하나 같이 뜻을 함께한 건 정말 모처럼의 일. 단지 전직 대통령 추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신'으로 상징되는 개혁을 국민이 여전히 갈망하는 탓 일 게다. 이번 조기 대선은 대통령 윤석열의 '자폭 계엄'으로 마련됐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려 온 현행 권력구조의 모순을 제대로 드러냈다. 자연스레 개헌 요구가 분출했다. 이에 3명 후보 모두 개헌안을 제시했다. 개별적 차이에도 큰 틀은 궤를 같이한다. 현행 5년 단임을 4년 연임 또는 4년 중임으로 바꾸는 것. 책임정치를 강화하고, 총선 또는 지방선거와 엇박자에 따른 국력 낭비를 최소화하는 게 핵심이다.
사실 노 전 대통령도 똑같은 내용을 담은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한 적 있다. 퇴임을 1년여 앞둔 지난 2007년 3월이었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에 막혀 아예 개헌 발의조차 하지 못했다.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 밖에 안 보이느냐." 당시 야당 유력 대권주자 박근혜 의원 말이다. 임기 말 인기 떨어진 대통령이 개헌 폭탄으로 판을 흔들기 위한 꼼수로 봤다. 졸지에 권력만 탐하는 나쁜 대통령 이미지에 갇혀 버린 노 전 대통령. "정치를 바꾸기 위해 정치인이 됐는데 결국 정치 문화를 바꾸지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신은 실패자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좌절을 지켜본 이병완 비서실장의 회고다. 만약 그가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반색했을까. 국민 또한 후보들의 개헌으로 '노무현식 개혁'이 이뤄진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그는 무척 아쉬워할 것 같다. 국민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임기 말 그가 던진 개헌은 더 큰 정치개혁을 위한 '떡밥'이었다. 임기 내내 그가 매달렸던 화두는 야당에 대통령 권한을 대폭 나누는 '대연정'.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 도입이란 전제가 달려 있긴 했다. 이 제안에도 야당은 "국면 전환용 노림수"라며 박절하게 거부했다. 심지어 여당, 열린우리당도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이로 인한 거대 양당 구도와 극한적 진영 대결. 이를 깨지 않고선 정치발전도, 국가 발전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가 오직 죽기살기식으로 치달으면 합리적 정책 기반마저 허물어질 것이라고 봤다. 대화와 타협은커녕 불신과 혐오가 판치면서 정권교체 뒤 정치보복 악순환을 걱정했다. 한 마디로 그의 대연정 구상은 '통 큰 협치'다. 연합정치의 비전이었다.
그의 퇴임 후 한국 정치는 완전히 거꾸로 갔다. 당장 그 자신이 다음 정권 '정치검찰'의 희생양 됐다. 그의 후임 대통령 모두 사법 처리 대상이 됐다. 그의 '친구'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은 탄핵 이후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급기야 '대통령발 내란'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순간 국가가 존망 위기로 내몰렸다. '내란 수괴' 혐의 대통령은 끝내 오리발을 내밀었다. 야당의 줄탄핵이야말로 내란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경고하기 위한 계엄이었다고 강변했다. 와중에 나라는 탄핵 찬반을 놓고 두 동강이 났다.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결정으로 일단 고비는 넘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기 대선 국면. 저마다 현 사태에 대한 책임론을 들먹이며 개혁을 외치고 있다.
개헌안도 그 방편의 하나. 냉정히 따져보자. '노무현의 대연정' 구상에 걸맞은 통 큰 협치를 위한 고민이 담겨 있는가. 아니올시다. 그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총리의 국회 추천을 담은 민주당 개헌안. 경우에 따라선 연정 기대를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단독 과반을 차지한 현시점에선 '꿩 먹고 알 먹고'쯤으로 비친다. 정녕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민주당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바로 소선거구제 혁파다. 민심이 제대로 의석에 반영되는 선거구제 도입. 이것이야말로 '노무현 꿈'의 시발이다. 이 경우 다당제는 불가피하다. 그게 돼야 연합정치가 진정 출발할 수 있다. 누구도 일방통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 때론 짜증도 나고 시간 역시 많이 걸린다. 그래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마냥 비상계엄도, 툭하면 나오는 줄탄핵도 없게 된다. 정말 대연정을 위한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 이게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노무현식 개혁'이다. 그가 꿈꿨던 '사람 사는 세상'. 서로 생각이 달라도 맞춰가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이다.